피 안 묻힌 정부, 칼자루는 석화 업계에…'폭탄돌리기' 시작

정진주 기자 (correctpearl@dailian.co.kr)

입력 2025.08.21 06:00  수정 2025.08.21 08:49

정부, 위기의 석화산업 구조개편안 발표…최대 370만t 규모 NCC 감축

선(先) 자구노력, 후(後) 정부 지원’ 방침 강조하며 무임승차 기업 경고

‘누가, 어떻게’ 방법론 빠진 채 기업 자율에 맡겨…"치킨게임 가속화"

ⓒ데일리안AI이미지 삽화

정부가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치킨게임’에 내몰린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위기 타개를 위해 대규모 설비 감축을 골자로 한 구조개편안을 내놓았다. 정부는 기업의 자발적인 사업 재편을 먼저 유도한 뒤 지원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이번 정부 대책에 대해 업계에서는 감축 총량만 제시됐을 뿐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빠져 있어 오히려 기업 간의 눈치 싸움을 부추길 수 있다는 비판과 위기 극복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가 엇갈리고 있다.


21일 산업통상자원부와 석화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전날 ‘석유화학산업 재도약을 위한 산업계 사업 재편 자율협약식’을 열고 3대 방향과 정부지원 3대 원칙을 담은 구조개편안을 공개했다.


이번 협약식에는 LG화학·롯데케미칼·한화솔루션·SK지오센트릭·DL케미칼·GS칼텍스·HD현대케미칼·에쓰오일·한화토탈·대한유화 등 10개 주요 석유화학 업체들이 참여했다. 다만 석화 ‘빅4’로 불리는 금호석유화학은 나프타분해시설(NCC)을 보유하고 있지 않아 참석하지 않았다.


구조개편 3대 방향은 ▲과잉 설비 감축 및 고부가 스페셜티 제품으로의 전환 ▲재무 건전성 확보 ▲지역경제·고용 영향 최소화 등이다. 정부는 ▲3개 석유화학 산업단지를 대상으로 한 구조개편 동시 추진 ▲자구노력 및 타당성 있는 사업재편 계획 마련 ▲종합지원 패키지 마련 등 3대 원칙에 따라 지원에 나설 계획이다.


이중 가장 핵심적인 안은 270만~370만t 규모의 NCC 감축이다. 이는 현재 증설 중인 시설까지 포함해 국내 전체 NCC 설비 총 생산능력 1470만t의 18~25%에 해당하는 양이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을 통해 제시된 감축 목표로 업계 역시 감축 총량에는 동의했다.


정부는 ‘선(先) 자구노력, 후(後) 정부 지원’ 방침을 내세우며 책임 있는 노력 없는 무임승차 기업에는 단호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부는 연말까지 기업별로 구체적인 사업 재편 계획안을 제출받아 금융, 세제, 연구개발 등 맞춤형 지원 패키지를 제공할 계획이다.


정부가 이처럼 ‘특단의 대책’을 내놓은 것은 국내 석유화학 산업이 구조적 공급과잉에 빠져 극심한 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위기의 주된 배경은 글로벌 공급 과잉, 특히 중국 기업들의 저가 생산 공세가 지목된다. 중국이 공격적으로 공급량을 늘리면서 국제 시장 경쟁이 격화됐고 국내 기업들은 수익성이 악화되더라도 시장 점유율을 지키기 위해 공장 가동률을 낮추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지면서 이른바 ‘치킨게임’ 양상까지 띠게 됐다.


정부는 이런 상황을 ‘무임승차’와 ‘도덕적 해이’로 보고 이번 대책을 통해 단호하게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현재 채권 금융기관의 압박이 시작되는 등 회사들의 상황이 녹록지 않다”고 전했다. 그는 “여천NCC 사태 역시 채권단의 부채 상환 요구에서 비롯됐다”며 “이번 정부 대책은 사업 재편을 앞당기는 촉매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피 안 묻히려는 정부”…치킨게임은 계속된다


그러나 이런 정부의 정책에 대해 다수의 업계 관계자들은 정부의 정책이 오히려 치킨게임을 가속화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구체적인 방법론이 빠진, ‘껍데기뿐인 대책’이라는 진단이다. 정부가 목표 숫자만 제시했을 뿐, 누가, 어떻게 줄일지에 대한 가이드를 주지 않아 기업 간의 혼란만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한 석화 업체 관계자는 “정부가 피를 한 방울도 안 묻히려고 한다”고 비판하며 “8개월이라는 ‘골든 타임’을 허비했다”고 언급했다.


정부는 지난해 말에도 ‘석유화학 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을 발표한 바 있다. 당시에도 정부는 기업들의 자발적 사업 재편을 전제로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내세워 업계에서는 실효성 없는 대책이란 비판이 일었었다.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말에도 비슷한 수준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번에도 구체적인 실행 방안 없이 목표 숫자만 추가된 보고서를 내놓았다”며 “정부가 산단별로 구체적인 감축량을 제시했어야 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처럼 전체 총량만 제시하면 기업들끼리 ‘누가 먼저 희생할지’를 결정할 수 없으며 이는 구조조정을 더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시각이다.


김용진 단국대 교수는 지난 정책인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제고방안에 비해 구체적 감축량을 설정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나,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지원책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김교수는 “정부에 뾰족한 대안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며 정부가 기업들의 ‘자발적 노력’에만 의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이번 구조개편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한 업계 전문가는 “정부가 목표로 하는 생산 감축량은 국내 석화 기업의 수익성을 어느정도 보장하는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이번 개편안이 기업들의 무임승차에 대한 페널티를 명확히 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이로써 끝까지 눈치를 보며 버티려는 기업에 불이익을 줌으로써 치킨게임을 끝낼 수 있는 타개책이 될 것으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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