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은 늘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 배우다. '동주', '타짜: 원 아이드 잭',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밀수', '1승', '전, 란', '하얼빈' 등 장르와 캐릭터의 경계를 넘나들며 서로 다른 얼굴을 보여왔다. 이번엔 연상호 감독의 동명 만화를 실사화한 영화 '얼굴'에서 데뷔 후 처음으로 1인 2역에 도전했다.
'얼굴'은 제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스페셜 프레젠테이션’ 섹션에 공식 초청돼 월드 프리미어를 마쳤으며, 지난 11일 개봉 후 호평 속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극 중 박정민은 시각장애를 가진 전각 장인 임영규의 젊은 시절과 그의 아들 임동환을 연기했다. 시각장애의 한계를 딛고 도장을 파며 성실히 살아가는 젊은 임영규, 그리고 40년 만에 백골 사체로 돌아온 어머니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아들 임동환까지, 닮은 듯 다른 두 인물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한층 확장된 연기를 선보였다.
처음부터 두 역할을 함께 연기하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작 만화를 읽고 난 뒤, 그의 마음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기울었다
"처음엔 아들 역할만 제안을 받았어요. 작품 출연을 결정한 뒤 부랴부랴 원작 만화를 봤는데, 아들보다 젊은 아버지 역할에 더 끌리더라고요. 혹시 그 역도 진행 중인지 여쭤봤더니 연상호 감독님이 간파하셨는지 '1인 2역도 생각하고 있다'라고 하시더군요. 두 인물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는 관계잖아요. 그 점이 흥미롭게 느껴졌고, 연기하면서도 어려움보다는 재미가 더 큰 도전이었습니다."
젊은 임영규는 시각장애를 가진 인물로, 위축되고 주변의 눈치를 많이 본다. 박정민은 이를 표현하기 위해 기존의 연기 습관을 깨고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젊은 영규는 주변 사람들에게 유난히 위축되고 비위를 맞추는 캐릭터예요. 제가 원래 왜소하지만 조금 더 왜소해 보이려고 노력했어요. 그렇게 해야 그의 비참함이 더 입체적으로 드러날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가짜 같고 비위를 맞추는 웃음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 감독님도 제 해석을 제지하지 않으셨어요. 저는 늘 인물을 연기할 때 실제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처럼 자연스럽게 표현하려고 해요. 하지만 이번 젊은 영규를 만들 때는 그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과감하게 해보고 싶은 대로 해보자고 했습니다. 특히 젊은 영규는 시각장애로 인해 다른 사람의 표정을 본 적이 없잖아요. 그 경험의 부재가 몸짓과 표정에도 묻어나도록 상상하며 연기했죠."
또한 장애의 표현에 치중하기보다 그가 겪는 감정과 관계의 결을 살리는 데 더 집중했다.
"권해효 선배님도 말씀하셨지만, 이 영화는 시각장애 그 자체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장애 연기에 집착하다가 다른 감정을 놓치는 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저희끼리 '내 뒤통수를 본다'라는 표현을 쓰면서 초점을 흐리게 했습니다. 완전히 시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청각과 촉각이 더 열리는 느낌을 표현하고자 했어요. 연기하기 전에 시각장애인 분 인터뷰를 진행했었는데 '너무 잘해주려 하지 말라. 좋은 걸 만들면 나도 산다'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그 말이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방향과도 닿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정민은 영화 '염력',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에 이어 세 번째로 연상호 감독과 호흡을 맞췄다. 처음에는 두 사람의 낯설었던 관계는 여러 차례의 작업을 통해 자연스럽게 신뢰로 이어졌다.
"연 감독님의 유머러스하면서도 숨어 있는 날카로운 시선이 굉장히 매력적이더라고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지옥'과 이번 '얼굴'입니다. 제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과 닮아 있고, 관객들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메시지를 던지거든요."
영화의 감정선을 정점으로 끌어올리는 마지막 장면은,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며 임동환이 오열하는 순간이다. 관객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이 장면은 박정민에게 특히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는 감정을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몰입시켰다.
"프리 단계에서 사진이 완성됐다고 들었는데 일부러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촬영 직전에 실수로 사진을 보게 됐어요. 그 순간 울컥하더라고요. 젊은 아버지 역을 연기하며 쌓인 감정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습니다. 만약 그 얼굴이 나의 엄마였다면, 평생 멸시만 당했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울음일 것 같았어요."
'얼굴'은 순 제작비 2억 원으로, 연상호 감독과 평소 호흡을 맞춘 20여 명의 스태프가 모여 완성했으며 배우들도 출연료 없이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예산이 작은 영화는 카메라 화각을 넓힐 수 없어서 배우 얼굴에 집중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상황에서 배우가 연기를 어렵게 한다거나, 방향이 맞지 않으면 정말 괴롭습니다. 제 얼굴을 계속 잡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번 영화는 그런 지점들이 거의 없었어요. 모니터를 보면서도 '이 연기가 별로네, 다음 테이크에서 고쳐야겠다'가 아니라 '괜찮은데, 다른 버전으로도 해볼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치 옵션을 하나씩 더 얹어가는 과정 같았어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도 다 비슷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테이크 수가 제한적이다 보니 한 번의 촬영 안에서 완성해야 한다는 긴장감이 컸어요. 그래서 더 절치부심하게 되고, 그 팽팽한 분위기 자체가 재미있었어요."
'얼굴'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작품이 던지는 질문으로 시선이 옮겨간다. 박정민은 이야기가 한 인물의 비극을 넘어, 지금의 사회와도 이어져 있다고 확신했다.
"이 영화는 성과주의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성공하기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이죠. 임영규라는 캐릭터는 개인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감독님 자신도 성과주의적인 면이 있어서, 그걸 되돌아보며 만든 작품인 것 같아요. 그래서 더더욱 자본 논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만들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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