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 넘어선 재일 한국인 이상일 감독, 혈통 넘어선 ‘국보’의 여정 [D:인터뷰]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5.11.16 12:15  수정 2025.11.16 13:13

재일 한국인으로서 일본 영화계에서 비(非)주류의 출발점을 가진 이상일 감독이, 혈통을 기반으로 계승되는 가부키 세계를 스크린에 옮기며 최고 성취를 향해 나아가는 상황은 작품 자체와 묘하게 겹쳐 보인다.


영화 ‘국보’는 국보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서로를 넘어야 했던 두 인물의 일생을 그린 작품으로, 일본 개봉 이후 칸국제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에 초청됐고 내년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 부문 일본 대표로도 출품됐다.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 관객과 만났지만, 11월 19일 정식 개봉을 앞둔 지금, 또 다른 긴장감을 숨기지 않았다.


"부산국제영화제는 페스티벌의 성격이라 관객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셨어요. 개봉은 관객들이 더 진지하게 볼테니 긴장이 됩니다. 일본에서 전해 듣기에 한국 극장가 사정이 좋지 않다고 들었어요. 일본의 전통 예능의 소재와 3시간이란 러닝타임 때문에 진입장벽이 높을 것 같아 걱정이 조금 되네요."


'국보'는 지난 6월 개봉 후 158일 만에 1207만 명 이상을 모으며 흥행 수익 170억 엔을 돌파했다. 11월 기준으로는 '춤추는 대수사선 극장판 2'(2003)의 173.5억 엔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며, 일본 실사 영화 흥행 1위 등극이 눈앞에 와 있다.


"일본에서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강세고 실사 영화는 어려운 흥행이 어려워요. 언급한 것과 같이 일본에서도 간단한 조건의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액션물도 아니고 드라마 영화화도 아니었고요. 사람들이 정보가 적은 상태로 휴먼 드라마를 보는 것이 힘들 것 같았지만 그걸 뚫고 나가는 작품의 힘을, 관객들이 이런 작품을 원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관객들이 깊은 눈으로 바라봐 주셔서 기쁜 심정입니다."


'국보'는 요시다 슈이치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 '악인', '분노'에 이어 그의 작품을 세 번째로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이상일 감독의 가부키와 온나가타라는 주제에 대한 관심이 작가의 취재와 집필로 확장되면서 다시 같은 지점으로 수렴했다. 두 사람이 쌓아온 신뢰가 새로운 형태로 결을 맞추며 '국보'가 출발할 여지를 마련한 셈이다.


"처음 '악인'에서 함께 작업했을 때 작가님이 그려내는 세계가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주제, 감정선, 인간의 어두운 결 같은 것들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고 느꼈어요. 이 작품의 시작은 '악인'을 완성하고 난 뒤였어요. 그 무렵 제가 '가부키, 특히 온나가타의 삶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작가님께 먼저 드렸죠. 그 아이디어에 대해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작가님도 흥미롭게 들어주셨어요. 하지만 그 뒤로는 각자 다른 작업을 하고 있었죠. 저는 제 영화를 준비하고, 작가님은 다른 소설을 쓰고 계셨고요. 사실 이 가부키 영화는 실현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렸습니다. 시대극이다 보니 제작비도 많이 들고, 해결해야 할 조건들도 많아서 쉽게 진행되지 않았어요. 그러던 중 시간이 흘러 작가님이 직접 가부키를 취재하며 소설 작업을 시작하셨다고 하더군요. 그때, ‘아, 우리가 예전에 나눴던 이야기가 작가님 안에 남아 있었구나’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래서 '국보'가 완성된 건 자연스러운 흐름 같았습니다. 함께 쌓아온 신뢰도 있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인연이 이 지점까지 저절로 이끌어준 것처럼 느껴졌어요.”


궁녀로 변신한 공주가 문지기에 복수하는 이야기를 그린 '국경의 관문'(세키노토, 関の扉), 부모와 자식의 유대를 사자춤으로 상징화한 '연사자'(렌지시, 連獅子), 이상화된 여성성을 화려한 동작으로 형상화한 '두 명의 등나무 아가씨'(니닌후지무스메, 二人藤娘),금기를 넘은 여인의 집착과 변화를 표현하는 '도조지의 두 사람'(니닌도조지, 二人道成寺), 운명적 사랑과 죽음을 다룬 비극 '소네자키 동반자살'(소네자키 신주, 曽根崎心中), 인간을 사랑한 백로의 희생을 그린 '백로아가씨'(사기무스메, 鷺娘) 등 다양한 가부키 무대가 영화에서 펼쳐진다. 이들 곡은 극의 정서와 인물의 내면을 확장하는 데 적합한 작품들로 구성돼 있으며, 장면마다 서로 다른 감정의 결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 속 가부키 무대는 하나의 오페라를 보는 느낌을 주고 있어요. 그래서 장대한 대서사시를 보는 듯한 느낌이 필요했습니다. 무대신과 드라마신이 헷갈려서는 안됐죠. 무대도 배우들의 하나의 삶이란 느낌으로 감정을 잇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그런식으로 가부키곡을 선정하고 장면을 만들었습니다."



가부키를 정면에서 다루는 만큼 제작 초기 취재 과정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전통 예술계를 설득해야 하는 구조적 장벽이 있었던 셈이다.


"일본에는 도호, 쇼치쿠, 도헤이 3대 영화사가 있어요. 그 중 쇼치쿠는 영화와 함께 가부키 공연도 맡아서 하고 있죠. 그런데 이 영화 배급은 도호였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취재가 어려웠습니다. 가부키 배우들을 소중하게 생각해 영화가 가부키를 이상하게 표현하면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어 조심스러워 하더군요. 영화가 개봉 한 뒤에는 가부키계에서도 반겨주셨어요. 배우들이 유튜브나 SNS에서 감상을 올리면서 '국보'가 좋은 바람을 일으켜줬다고 말했죠. 특히 일본의 젊은 세대는 가부키를 직접 보러 가는 문화가 거의 없어요. 그런데 이번 영화를 계기로 조금 변화가 생겼다고 들었어요. 가부키 극장이 이전보다 활기를 되찾았다고 하더라고요."


만키쿠는 어린 시절 키쿠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의 가능성을 직감한 인물이다. 훗날 키쿠오가 무너졌을 때 다시 무대로 불러올린 것도 만키쿠였다. 감독은 이 관계를 어떤 감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이어서 설명했다.


"만키쿠는 키쿠오에게서 자신과 똑같은 뿌리를 본 거죠. 키쿠오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지켜보기도 하고요. 만키쿠가 도중에 슌스케는 가르치지만 키쿠오를 직접 가르치진 않아요. 자신이 자신을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죠. 만키쿠는 키쿠오가 무대 밖에는 삶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마지막에 너의 삶은 무대에 있다는 걸 알려준 거예요. 사실 만키쿠의 마지막이 보는 사람에 따라 초라하게, 아니면 평온하게 보일 수 있는데, 키쿠오는 인생을 걸고 아름다움을 추구한 만키쿠의 말년을 평온하게 봤을 거라고 생각해요."


가부키는 대대로 이어지는 가족 세습 구조가 강하게 자리 잡은 예술이다. 역할과 이름, 예술적 계보가 대부분 피를 통해 전승되는 만큼 혈통이 전승의 조건처럼 여겨진다. 이런 전통 안에서 만키쿠와 키쿠오는 모두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것으로 설정됐다. 이 감독은 이 지점에서 두 사람이 혈통을 넘어 예술로 연결되는 또 다른 계승 방식을 형상화하고자 했다


“만기쿠와 기쿠오를 저는 같은 흐름에서 보고 있어요. 결국 ‘대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상황에서, 기쿠오가 그 자리를 대신해 이어가는 느낌이죠. 혈통이 아니라 예술로 계승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키쿠오 역시 혈통이 아니라도, 그 예술을 이어갈 사람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방식의 계승도 저는 괜찮다고 봐요."


‘국보’는 반세기에 걸친 인물을 다루지만, 화면은 철저히 무대 주변과 대기 공간, 분장실, 인물의 일상 등 내부 동선에 머문다.


"50년이라는 긴 시간의 인생 영화지만 특징 중 하나가 시대적 상황이나 사회적인 사건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가부키라는 한정된 세계에서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에만 집중했어요. 예를 들면 무대 뒷 통로를 보여주며 배우들이 살아가는 공간 안에서의 시간 흐름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를 더 고민했죠."


영화는 가부키의 동작이나 아름다움을 흉내 내는 데 목적이 있는 영화가 아니다. 무대에 서 있는 한 인물이 어떤 마음으로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지, 숨 막히는 순간에 어떤 표정이 스쳐 가는지를 담는 것 역시 중요한 임무였다. 그렇기에 이 감독은 가부키 배우가 아닌 영화 배우가 키쿠오를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를 시작할 때도 '왜 가부키 배우가 아니라 영화배우가 연기하느냐'는 이야기가 꽤 나왔어요. 그런데 저는 처음부터 이건 반드시 영화배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확신하게 된 순간이 있었어요. 키쿠오가 오하츠를 대역으로 연기하던 장면이었죠. 그 장면에서 키쿠오가 단순히 '가부키를 잘 연기했다'는 게 아니라, 키쿠오라는 인물의 기쁨이나 압박감 같은 내면이 카메라에 그대로 잡히더라고요. 그건 영화배우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순간이죠. '그래, 이래서 영화배우가 해야 하는 거였다'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던 스태프들도, 요시자와 료도 모두 그걸 느꼈어요."



기쿠오와 슌스케의 출발점은 극명하게 다르다. 기쿠오는 재능은 있지만 가문 밖에서 들어온 인물이고, 슌스케는 태생부터 무대 위에 설 수밖에 없는 집안의 정통 후계자다. 요시자와 료와 요코하마 류세이는, 감독이 그린 기쿠오와 슌스케의 결을 가장 자연스럽게 구현할 수 있는 얼굴과 에너지를 지닌 배우들이라고 판단됐다. 특히 이상일 감독은 기획단계부터 요시자와 료가 아니면 만들지 못할 것이라고 꾸준히 언급해 왔다.


"요시자와 료는 '리버스 에지', '킹덤' 1편에서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킹덤'은 액션이고 현실보다 만화적인 세계관에 가깝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 안에서 요시자와 료만은 정말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어요. 그게 아주 뚜렷하게 남았죠. 류세이는 '유랑의 달'에서 같이 작업했었는데, 겉으로 보면 굉장히 쿨해 보여요. 그런데 실제로는 엄청 노력하고, 자기가 가진 좋은 모습을 최대한 보여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에요. 정말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뜨겁게 느껴지는 사람이고, 그래서 어떤 순간엔 귀엽게 보이기도 합니다. 요시자와와 요코하마는 서로 완전히 달라요. 마치 고양이와 강아지 같은 느낌이랄까요.”


키쿠오가 국보에 오르기까지의 길에는 주변의 희생이 겹겹이 쌓여 있다. 영화는 그의 삶이 중심에 놓여 있음에도, 그 궤적에서 비껴난 인물들의 이야기도 적극적으로 노출한다.


"이 영화는 가부키에 인생을 바친 배우, 그리고 그 사람 자체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무대 위에서 빛을 받는 사람들은 그만큼 더 깊은 그림자를 갖게 되죠. 밝은 조명을 받을수록 그림자가 짙게 드러나는 것처럼, 그 복잡한 내면과 무게를 보여주려면 그런 결을 가진 배우가 필요했어요. 그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인상적으로 보이려면, 결국 그런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키쿠오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뒤 등에 수리부엉이 문신을 새긴다. 수리부엉이는 '은혜를 갚는 존재'로 언급된다. 그렇다 보니 키쿠오의 문신이 무엇을 의미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건 그냥 예술이죠. 부모님을 모두 잃은 키쿠오를 가부키가 건져낸 거예요. 은혜에 보답한다는 마음이라기보다 본인이 스스로 행복을 내려놓으면서까지 그 예술에 자신을 바치게 됐고, 그리고 그걸 원했던 사람이죠. 그 점에서 '백로 아가씨' 이야기와 닮아 있어요. 사랑하는 인간을 위해 목숨을 걸고 여인의 모습으로 변했다가 결국 죽어가는 백로처럼, 키쿠오도 무언가에 완전히 빠져들어서 결국 자신의 생명 같은 것을 바치는 사람이에요. 저는 그 두 서사가 자연스레 겹쳐 보였어요."


키쿠오가 평생 붙잡고 달려온 어떤 장면이 있다는 건 영화 내내 암시된다. 그는 무대 위에서도, 인생의 굴곡을 지나면서도 늘 같은 방향을 향해 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키쿠오는 찾아 헤매던 풍경을 보게 되고, 그 순간이 묘하게 슬픔과 해방감이 동시에 스친다.


"키쿠오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순간은 인생에서 제일 아픈 기억이에요. 눈 속에서 아버지가 쓰러지고, 피가 번지고, 계속 눈이 내리잖아요. 비극적인 장면인데 이상하게도 본인한테는 너무 아름답게 각인된 순간인 거죠. 그게 말하자면 그 사람의 원풍경 같은 거예요. 그 이후로도 가부키를 하면서 그 아름다운 찰나를 계속 찾아가려고 했던 거죠."


이상일 감독은 '국보'를 통해 인물들의 삶을 단일한 비애로 고정하지 않고, 그 안에 깃든 에너지와 선택의 의미까지 함께 바라보길 바랐다.


"그들의 삶에는 비애나 슬픔 같은 감정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동시에 그걸 단순히 ‘슬프다’라고만 봐야 하는가, 또 그들이 스스로는 그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궁금함도 있었어요. 표현을 조금 쉽게 하자면, 이 사람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자신을 다 불태우는 방식으로 살아가죠. 단순히 소모되는 게 아니라, 자기 불꽃으로 모든 것을 태워서 끝까지 자신이 원하는 걸 완수해내는 삶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런 삶에는 어두운 순간도 많겠지만, 어떤 순간에는 실제로 빛이 나는 순간이 있거든요. 저는 그런 방식의 삶을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관객들도 그들의 삶을 슬픔만으로 보지 않고, 그 안에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와 의미를 함께 느껴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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