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강한 힘이 질서를 가져온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명분이 없는 힘은 질서가 아니라 혼란을 가져온다. 고려의 무신 정권이 대표적이다. 대부분 무신 집권자들은 반대파에 대한 잔혹한 처벌을 통해 자신에 대한 복종을 이끌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능력과 명분이 없는 무신들의 집권은 질서와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켰다. 탐욕스러운 그들의 수탈에 시달린 백성들이 하나둘씩 반란을 일으켰고, 힘들게 토벌한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참혹한 처벌로 인한 피비린내가 가시기 전에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나는 것이 반복된 것은 힘에 의지한 잘못된 정치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다.
명종 12년인 서기 1182년 3월, 전주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김사미와 효심이 운문과 초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 당한 지 불과 5년만 벌어진 일이었다. 반란의 주체는 기두(旗頭)인 죽동(竹同)이라는 인물이었다. 기두는 한 부대의 책임자라는 뜻인데 여러 가지 정황상 실제 군대는 아니고 일종의 기술자나 노동자 집단의 책임자로 보인다. 공사판에서 쓰는 일본어 용어인 오야지(おやじ)가 떠오른다.
호남제일문이라고도 불리는 전주성의 풍남문 (필자 촬영)
일의 발단은 전주사록 진대유 때문이었다. 사록은 지방의 대도호부나 목 같은 행정 중심지에 배치된 관리로서 전주는 고려의 지방행정 조직인 12목 중에 하나인 전주목이 설치된 곳이었다. 진대유는 스스로 공명정대하다고 생각하고 이걸 실천하기 위해서 무척 가혹하게 백성들을 다스렸다. 덧붙인 설명은 없지만 아마도 아랫사람들에게는 가혹하게 스스로에게는 관대한 스타일이 분명하다. 조정에서 관선의 제조를 명하자 진대유는 상호장인 이택민 등을 시켜서 백성들을 닦달해서 일을 진행했다.
가뜩이나 불만이 쌓여있던 전주의 백성들은 결국 반란을 일으킨다. 주모자는 기두인 죽동을 비롯한 6명이었다. 기두가 기술자나 노동자 집단의 우두머리라면 아마도 여러 집단이 힘을 합쳐서 반란을 일으켰고, 죽동을 비롯한 기두들이 선두에 섰을 것이다. 여기에 관노와 불평불만을 품은 백성들이 가세했다. 삽시간에 전주성을 장악한 이들은 진대유를 성 밖의 사찰로 내쫓고 이택민을 비롯한 십여명의 향리들 집을 불태워 버렸다. 겁에 질린 향리들이 도망가자, 판관 고효승을 위협해서 새로 향리들을 임명했다. 소식을 들은 고려 조정에서 안찰사 박유보를 파견한다.
박유보가 전주성에 도착하자 죽동은 반란군을 도열시켜서 기세를 떨치면서 진대유의 폭정으로 인해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한다. 박유보가 일단 진대유를 개경으로 압송시킨 다음에 반란군들에게 항복하라고 설득한다. 하지만 죽동은 설득을 듣지 않고 계속 버틴다, 결국 진압군이 집결하자 죽동은 성문을 닫고 버티기에 들어간다. 이 과정은 물론 죽동의 독단적인 행동은 아닐 것이고, 전주성의 백성들이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 진대유를 처벌하는 것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죽동이 이끄는 반란군은 무려 40여 일이나 진압군의 공격을 막으면서 전주성을 지킨다.
불안감은 있었겠지만, 전주성의 백성들은 그동안 가혹한 수탈이나 혹독한 처벌이 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실패한 반란이 그렇듯 종말이 다가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은 커져갔을 것이고 리더인 죽동에 대한 불평도 스물스물 생겨났을 것이다. 그 점을 파고든 진압군 측은 일품군의 대정 한명을 회유한다. 일품군은 고려의 지방군인 주현군 중 하나로 이품군과 삼품군과 더불어서 전투가 아니라 노역을 위해 동원된 군대다. 대정은 고려의 무관직 중 최하급인 종9품 관직으로 25명으로 구성된 대의 지휘관으로 지금으로 치면 소대장 정도 된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일품군의 대정은 진압군의 회유에 넘어간다. 그는 승려들과 함께 힘을 합쳐서 죽동과 10여명의 주동자를 죽이고 성문을 열어서 진압군을 맞이한다. 이것으로 전주성이 겪은 40여일 간의 자유는 막을 내린다. 성문을 열고 들어온 진압군은 추가로 반란군 중 30여명을 색출해서 처형하고 성을 허물어버린다. 그 과정에서 전주성의 백성들 중 상당수는 피해와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그나마 추가적인 처벌 기록이 없는 걸로 봐서는 진압한 고려 조정도 이 정도로 만족한 것으로 보인다.
망이와 망소이의 반란, 그리고 그들과 손잡은 손청의 반란이 진압되고 나서 고려 조정은 이제야 남적들을 토벌하는데 성공했다고 한숨을 돌렸을 것이다. 그리고 잡초같이 일어난 죽동의 반란을 평정한 이후에는 진짜 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이 틀리다는 것이 입증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무리 짓밟아도 분노한 백성들은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무신 집권기에 크고 작은 반란이 엄청나게 많이 일어났다. 힘이 모든 것을 정리하지 못한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는 가장 명확한 사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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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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