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 전도연은 훌륭, 이야기는 글쎄…'협녀'
박흥식 감독 11년 동안 공들인 영화
이병헌 전도연 김고은 등 연기 일품
칼이 곧 권력이고, 천민도 왕이 될 수 있었던 고려 말 무신정권 시절. 백성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던 때, 세 검객 풍진삼협(풍천·설랑·유백)은 세상을 바꾸고자 뜻을 모아 민란의 선봉장이 된다.
"검에는 검을 쥐었던 자가 심어 놓은 마음이 있다"는 말처럼 세 검객은 각자의 검에 혼을 불어넣는다. 맏형 풍천(배수빈)의 칼은 뜻을 세우고, 설랑(전도연)의 칼은 불의에 맞서며, 막내 덕기(이병헌)의 칼은 소중한 것을 지켜 뜻을 완성하는 것이다.
셋 중 설랑과 유백은 서로를 목숨보다 아끼는 연인으로 한날 한시에 죽기로 맹세한다. 그러나 유백은 권력의 유혹 앞에 무너지고, 설랑은 유백에게 피를 토하듯 말한다. "피로 지은 죄, 피로 거둔다." 그렇게 세 검객의 대의는 한 순간에 산산조각이 난다.
유백의 뼈아픈 배신과 대의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속에 살아가던 월소는 풍천의 딸 홍이(김고은)를 데려와 덕기에 대한 복수를 완성할 검객으로 길러낸다.
18년 후 유백은 노비의 자식이라는 멸시와 세도가들의 계략에 맞서 살생도 서슴지 않는 최고 권력자가 된다. 그러던 중 자신이 연 무술대회에서 월소를 닮은 소녀를 발견하고 그 뒤를 쫓는다.
유백의 배신 이후 두 눈을 잃고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던 월소는 홍이가 무술대회에서 유백과 마주쳤다는 사실을 알고 감춰왔던 진실을 털어놓는다.
"내가 네 아비와 어미를 죽인 원수다. 다음에 만날 때 너와 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홍이는 배신감에 휩싸인다.
무협 사극을 표방하는 '협녀, 칼의 기억'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2001), '인어공주'(2004)를 연출한 박흥식 감독이 무려 11년 동안 공을 들인 작품이다. 지난해 50억 동영상 협박 사건으로 구설에 오른 이병헌의 국내 무대 복귀작으로 화제가 된 바 있다.
영화는 첫 장면에서부터 와이어 액션 장면이 등장하는 등 배우들의 검술 액션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슬로우모션 등의 효과로 우아한 춤을 추는 듯한 액션신과 유려한 영상미의 조화가 영화의 미덕이다.
극 후반부 홍이가 검 하나로 장정들을 차례로 쓰러뜨리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로 꼽을 만하다. 이후 눈발이 흩날리는 배경 뒤로 슬픈 운명에 맞닥뜨린 유백과 홍이가 펼치는 액션신은 극의 몰입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영화를 이끄는 주된 정서는 사랑이다. 죽도록 밉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설랑과 유백의 드라마는 영화의 주축이 된다. "진짜 좋은 건 모르는 듯 아는 듯 천천히 오는 것"이라는 설랑의 말처럼 운명을 타고난 설랑과 유백은 오랜 세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서로를 그리워했다고, 서로에게 칼을 겨누었어도 그 끝엔 사랑이 남아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박 감독은 "그리스 대서사시처럼 장중하고 서정적인 영화다. 비극적일 수 있지만 아름다운 영화라고 생각한다. 무협보다는 인물의 감정에 초점을 맞춰 연출했다"고 밝혔다. '협녀, 칼의 기억' 만의 강점으로는 "이병헌 전도연 김고은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다"고 자신했다.
박 감독의 말마따나 이병헌 전도연 김고은 모두 흠잡을 데 없는 연기를 펼쳤다. 협박 사건으로 온갖 비난을 받은 이병헌의 연기는 뭐라고 지적할 수 없는 수준이다.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와 유백의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깊은 눈빛은 "그래도 배우 이병헌은 이병헌"이라는 얘기가 나오게 한다.
시각 장애인 연기를 펼친 전도연 역시 마찬가지다. 작품마다 맡은 역할에 빙의한 그는 이번에도 설랑 그 자체다. 사랑하는 연인을 향해 복수를 품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한 여인의 처절한 심정을 목소리, 눈빛, 몸짓에 오롯이 담아냈다.
가장 놀라운 배우는 김고은이다. "이병헌 전도연에게 필적할 만한 여배우"라는 말처럼 김고은은 작고 여린 체구에도 강렬한 에너지를 내뿜는다. '은교', '몬스터', '차이나타운' 등을 통해 차근차근 쌓아올린 연기 내공이 이번 영화에서 폭발하듯 터진다.
유백을 선망하는 청년 율을 연기한 2PM 출신 이준호의 연기도 극에 잘 어울렸고, 이경영 배수빈 등 조연들의 연기도 나무랄 데 없다.
아쉬운 점도 있다. 와이어 액션을 남발하다 보니 어색한 부분이 눈에 보이고, 액션 장면에선 '와호장룡'을 떠올리게 하는 기시감을 느낀다.
무협과 멜로 모두에 욕심을 낸 탓일까. 스토리는 비교적 탄탄하지 않다.
캐릭터들이 급변하는 모습에선 부연 설명이 부족해 공감의 표면적을 좁혀버린다. 권력을 탐하던 유백이 마지막 장면에서 마음이 약해진 부분에선 설득력이 떨어지고, 유백을 증오했던 설랑이 유백에 대한 사랑을 갑자기 드러내는 지점에선 실소가 터져나온다.
홍이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됐는데도 설랑과 유백에게 칼날을 겨누는 장면에서는 "왜 굳이 저렇게 해야 하지?"라며 고개를 갸웃하는 관객들이 있을 듯하다.
13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1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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