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성민이 영화 '로봇, 소리'를 통해 생애 첫 원톱 주인공으로 나섰다.ⓒ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악수로 시작해서 악수로 끝났다. 이성민(47)과의 인터뷰가 그랬다.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취재진에게 먼저 손을 내민 그에게선 특유의 '옆집 아저씨' 같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잠시 잊혔다.
이성민은 '로봇, 소리'(감독 이호재·27일 개봉)에서 10년 전 잃어버린 딸을 찾아다니는 아버지 해관 역을 맡았다. 그것도 휴머노이드 로봇(인간형)과 함께. 이 로봇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기억한다.
국내 영화가 로봇을 소재로 내세운 건 처음이다. 로봇과 인간과의 교감이라. 도대체 무슨 얘기일까 싶지만 영화는 우려를 뛰어넘는 소소한 재미와 감동을 전한다.
이런 독특한 작품에 용감하게 발을 들이민 이성민은 데뷔 후 첫 원톱 주연을 꿰찼다. 주연에 대한 부담감, 책임감 때문에 언론시사회 당시 이성민은 꽤 긴장했다. 함께 출연한 이희준조차 "선배가 이렇게 긴장한 모습을 처음 본다"고 했을 정도.
20일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떨리고 긴장돼 잠을 설쳤다"면서 "영화를 찍을 당시에는 몰랐는데 개봉을 앞두고 중압감이 엄청나다"고 토로했다.
"영화가 잘 안 되면 모든 게 제 탓인 것만 같아요. 의지할 곳이 없는 듯한 느낌이에요. 흐흐. 무엇보다 영화에 참여한 배우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이희준, 이하늬, 전혜진 등 모두 고마워요. 튀지 않은 역할을 누가 하겠어요? 함께한 곽시양, 류준열, 채수빈 같은 신예들도 사랑스럽고요(웃음)."
경북 봉화의 시골 출신인 그는 배우의 꿈을 위해 20대 시절 대구 연극 무대로 진출했다. 당시 생활고 때문에 쪽방에서 울었을 정도로 굶주림의 시간을 거친 이성민은 2000년대 초반 서울로 올라와 극단 차이무 단원으로 활동하며 다수의 연극에 출연했다.
이후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면서 차곡차곡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실력은 출중하지만 알아주는 이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나 포기는 없다. 꾸준히 한 길을 걸었다. '대왕세종'(2008), '파스타'(2010), '브레인'(2011), '더킹 투하츠'(2012) 등을 비롯해 40여 편이 넘는 작품에 쉼 없이 출연했다.
배우 이성민은 영화 '로봇, 소리'에서 10년 전 실종된 딸을 찾는 아버지 해관 역을 맡았다.ⓒ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연기 경력 30년 중 20년을 무명에 가깝게 산 그는 '골든타임'(2012)으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만난 작품 tvN '미생'(2014)에서 '빵' 터졌다. 최근 출연작은 '변호인'(2013), '군도: 민란의 시대'(2014), '빅매치'(2014), '손님'(2015) 등이다. 주연이 아닌 조연이다.
그런 그에게 첫 주연작인 '로봇, 소리'는 꿈을 이룬 작품이나 다름없다. 기쁘고 설렐 줄만 알았는데 "하루하루 피가 마른다"고 했다.
"어릴 때 연기하겠다고 꿈을 꾸고, 배우가 되겠다고 몸부림치던 제가 바라던 꿈이 실현된 순간이에요. 영화에 처음 출연할 때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지만 포스터와 크레디트에 제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온 건 이번 작품이 처음이죠. 중압감을 느낄 거라곤 미처 생각 못 했는데...하하. 실수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이성민이 우려하는 것 중에 가장 큰 부분은 관객들이 배우와 로봇의 호흡을 어떻게 보느냐다.
이성민은 "처음엔 '뭐지?'라고 확신이 안 섰다"며 "촬영을 할수록 로봇과의 호흡이 괜찮았고 억지로 쥐어짜지 않는 담담한 감정과 감동이 마음에 들었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마따나 영화는 로봇과의 교감을 자연스럽게 담으며 적당한 선에서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이성민은 '소리'를 딸처럼 여기며 빛나게 해준다. 인터뷰 자리에는 '소리'도 동행했다. 든든한 지원군 같았다.
리액션이 없는 로봇과의 교감을 어떻게 이뤄냈을까. "'로봇과 연기를 하면 어떨까' 궁금했는데 막상 해보니 어렵지 않았어요. 연기하면서 '소리'를 서서히 알아가는 과정이 흥미로웠죠. '내가 이렇게 하면 소리는 이렇게 반응하겠지', '소리는 이럴 거야'라고 상상하면서 연기했습니다."
영화 '로봇, 소리'에서 첫 주연으로 나선 이성민은 "떨리고 긴장된다"고 개봉을 앞둔 소감을 밝혔다.ⓒ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현장에선 '소리'의 대사를 읽어주는 배우가 따로 있었다. '소리'의 진짜 목소리는 배우 심은경이 연기했다. 덕분에 딱딱한 로봇은 귀엽고 친근한 존재로 탈바꿈했다. 이성민은 "내가 놓쳤던 부분을 심은경이 채워줬다"며 "목소리를 바꾸는 모습에 감탄했다"고 했다.
실제 중학생 딸을 둔 그가 딸이 실종된 아픔을 겪는 캐릭터를 연기하기도 쉽지 않았을 터. 이성민은 "멋있거나 상상 속에 있을 법한 캐릭터가 아니라 평범하고 보편적인 아버지를 연기하려고 했다"며 "딸 가진 아버지로서 캐릭터를 이해하려고 했다"고 했다.
영화 찍으면서 가족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그는 '로봇, 소리'를 하면서는 가족이 떠올랐다고 했다. 특히 사춘기에 접어든 딸이 생각났다고. "딸이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재밌다고 하더라고요. 딸한테 괜찮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듣고 싶어요. "
극 중 해관은 딸의 꿈을 반대하며 충돌한다. 실제 이성민은 어떤 아빠일까.
"딸이 어려서 꿈을 아직 안 정한 듯한데 언젠가 생기겠죠. 위험하거나 나쁘지 않으면 지지해줄 생각입니다. 자기 인생이니까 본인이 알아서 살아야겠죠. 단 배우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배우는 딱 저만으로 만족할래요. 땀 흘리면서 정직하게 일하고, 평범하게 살았으면 해요."
이번 영화에서 이성민은 액션신도 소화했다. 무거운 '소리' 들고 뛰는 장면에서부터 수중 촬영도 했다. 수중 촬영 땐 지네한테 물린 적도 있다고. "정말 아팠어요.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었답니다. 발가락에 흉터가 남아 있어요."
가장 뭉클한 장면으로는 딸과 추억이 깃든 아이스크림 집 앞에서 '소리'와 재회하는 장면, '소리'가 딸의 마지막 메시지를 들려준 장면, 천문대에서 '소리'와 마음 터놓고 얘기하는 장면 등을 꼽았다.
순간 울컥 했고 '소리'를 로봇이 아닌 진짜 배우로 인정했단다. "로봇과의 교감을 느꼈어요. 사람이 아닌데도 참 멋있더라고요."
'로봇, 소리'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는 '오빠생각'과 경쟁한다. 둘 다 감동을 내세운다. '로봇, 소리'만의 강점은 무엇일까. "일단 로봇이 나오고요. 하하. 처음 시도한다는 점, 그리고 '예상보다' 괜찮은 작품이라고 자신합니다."
후속작은 tvN 드라마 '기억'. 알츠하이머에 걸린 변호사 박태석 역을 맡았다. 영화에 이어 또 '원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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