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탄핵사태가 대한민국 유권자에게 던진 과제?
보수 본류 민심과 동떨어진 대통령 인터뷰 방언(方言)
후보자 내면세계까지 투시해야 하는 안목 요구
대선 시계가 ‘4말5초’를 향해 달려가면서 대권주자들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대국민 지지도에서 앞서가는 주자는 대세를 굳히기 위해, 쫓아가는 주자는 우열을 뒤집기 위해 갖가지 묘책을 짜내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표심을 흔들 수 있는 수단은 공약 발표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군복무기간 단축,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의 청년일자리 창출, 이재명 성남시장의 기본소득제 도입, 안철수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의 대선 직후 개헌, 안희정 충남지사의 행정수도 이전,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의 저출산대책, 남경필 경기지사의 사교육 폐지 등등.
역대 대선을 몇 차례 치르고 시간이 꽤 흐른 지금, 유권자들이 과연 공약에 의지해 적임의 지도자를 뽑을 수 있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번듯한 공약이 없어서 탄핵 위기에 몰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약 불이행 때문에 ‘실패한 대통령’ 직전까지 몰린 것도 아니다. ‘경제민주화’라는, 많은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던 대표 공약이 있었고, 또 집권 1년을 넘기면서 ‘경제활성화’로 기수를 돌렸지만 지금 논란이 되는 탄핵과는 전혀 무관하다. 탄핵소추안에 나열된 탄핵소추 사유에는 공약 관련 단어는 한마디도 없다.
당선 이후에 공약을 곧이곧대로 실천한다고 해서 그것도 최선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은 각각 수도(首都) 이전과 대운하사업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취임 직후부터 이들은 강력한 의지를 갖고 공약 이행을 밀어붙였으나 주위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방향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 이전은 헌재의 위헌 심판으로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변경됐고, 대운하사업은 야당의 반대에 부딪혀 4대강 사업으로 축소돼 추진됐다. 이후 5년 내지 10년이 지난 지금, 그들 공약이 이들을 ‘대통령으로 뽑길 잘했다’는 확신을 갖도록 하는 데는 별로 기여를 못하고 있다. 지금도 세종시로 옮아간 공직사회의 비효율성은 비판 여론의 도마 위를 오르내리고 있고, 4대강 사업도 환경파괴 시비로부터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공약의 기능은 무엇인가? 선거를 앞두고 잠시 유권자들의 표심을 유혹하는 포장술의 일부라고 의미를 축소해야 하나? 현대 선거전에서 후보자를 실제 내용물보다 부풀려 화려하게 포장한 뒤 유권자들 앞에 서도록 만드는 기술은 엄청 발달했다. 홍보전문업체를 동원해서 만든 캐치프레이즈와 공약, 각종 홍보물은 물론이고 후보자의 연출된 레토릭과 쇼맨십도 포장술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홍보전문가의 조언과 손길을 거치면 한층 더 세련되게 다듬어진다. 그러나 이들은 유권자의 눈을 현혹해서 한순간 판단을 흐리게 하는 술수에 불과하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당선의 기쁨을 뒤로 하고 국정운영에 본격적으로 들어갔을 때 ‘성공적인 대통령’으로 평가받기 위해 요구되는 역량과 자질은 따로 있다는 사실이 경험적으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법치와 인치에 대한 개념은 분명히 갖고 있는지, 공사(公私) 구분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정경유착에 대해선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 등등 쉽게 드러나지 않는 후보자의 내면적 특성이 겉으로 드러난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참모의 도움을 받아 언론 인터뷰에서 ‘정답’을 얘기했다 하더라도 이중적인 인격을 갖고 있다면 실제 행동은 별개다. 후보자를 겹겹이 감싸고 있는 양파껍질을 모두 벗겨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내용물들이 화려한 포장지 안에 숨어서 활개를 펼 때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선거’보다 나은 지도자 선출 방식은 없다. 하지만 선거제도가 아무리 발달해도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공정하고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지도자 중에서도 독재자가 나오고 국정파탄자가 생기며 실패한 대통령도 있기 때문이다. 몰카를 동원해서 후보자의 사생활을 꼼꼼히 들여다 보지 않는 이상, 최면술을 동원해서 후보자의 무의식 세계까지 들여야 보지 않는 이상 후보자를 제대로 검증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역대 선거에서 많은 유권자들은 최선보다는 차악을 선택하며 현실과 타협해 왔을 수도 있다. 누가 최선의 적임자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부적합자가 누군지는 충분히 걸러 왔다고 자신할 만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이 지난 25일 인터뷰방송 ‘정규재 TV’와 가진 인터뷰 내용을 보면 그런 믿음마저 흔들리게 만든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유라 씨가 박 대통령의 딸이라고 믿지 않는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윤회 씨와의 밀회설을 믿지 않는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고 믿지 않는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지난해 12월9일 국회가 통과시킨 탄핵 소추안에 근거해 대통령의 언행을 의심하고 있다.
대통령은 이런 낭설들을 겨냥해 “사실이 아니다”고 부인하면서 최순실 사건에 대해 “뭔가 오래전부터 기획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탄핵을 위해 그토록 많은 거짓말을 만들어낸 것이라면 탄핵 근거가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라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인터뷰에서 소수의 국민들이 지어내 퍼뜨린 내용을 반박하면서 자신에 대한 탄핵소추의 부당성을 항변했다. 대부분의 보수층에겐 관심 밖에 있는 헛소문을 언론 인터뷰의 장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으려 했다. 이날 발언이 한때 자신을 지지했던 51.6% 국민들로부터 얼마나 공감을 얻었을지는 의문이다. 단지 탄핵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하는 소수 국민들을 상대로 ‘방언(方言)’을 주고 받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결과적으로 보수 본류의 민심과는 동떨어진 사고의 한 단면을 보여준 셈이다. 탄핵 사태가 우연이 아니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지금 한창 여야 대선주자들은 대권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시끌벅적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상대방 공약이 현실성 있고 없고, 누구 발언이 타당하고 않고를 따지면서 서로 물고 물리는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요란스런 음향효과와 과장 연기, 장광설, 동정 호소, 서민 코스프레 등에 현혹돼 정신을 놓거나 판단을 흐려서는 곤란할 것이다. 이번에는 후보자들이 애써 감추려는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투시안목까지 갖추고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야 하는 과제 앞에 대한민국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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