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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교과서 속 일제만행 관련 사진은 ‘가짜’”


입력 2020.09.11 11:38 수정 2020.09.11 11:59        데스크 (desk@dailian.co.kr)

'청산리 전투' '독립군 처형' 관련 사진, 잘못 알려져

'북로군정서' 관련 사진은 출처 불분명

‘청산리 전투에서 패하고 철수하는 일본군’으로 잘못 알려진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로 알려졌지만, 원 출처는 '지나사변화보'(1939년)다. ‘청산리 전투에서 패하고 철수하는 일본군’으로 잘못 알려진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로 알려졌지만, 원 출처는 '지나사변화보'(1939년)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다. 백마디 말보다 직접 보는 것이 낫다는 의미다. 사진이 갖는 힘도 여기에 있다. 소식을 전달하면서 한 장의 사진이 갖고 있는 힘은 수백마디의 말보다 더 강한 울림을 전한다. 3.1운동 당시 일제가 제암리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저지른 만행을 세계에 알릴 수 있었고,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당시 우리 민족이 당한 피해를 알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기록과 함께 사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속세대에게 우리의 역사를 전달하기 위한 교과서에도 시각자료로서 사진자료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최근 초등학교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교과서까지 역사 관련 교과서를 살펴보면 거의 모든 페이지에 역사적 설명과 함께 사진 혹은 삽화 등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다. 활자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 사진과 삽화를 통해 독자가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을 포함하는 것은 단순히 서술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부수적 효과뿐만 아니라, 역사적 서술 자체에 대한 신뢰를 부여하기 위한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3.1운동 당시 일제가 제암리에서 저지른 만행을 알리면서 각종 증언과 함께 전달된 사진은 일제의 만행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일제의 적극적인 언론 공세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근거로 작용하여, 1920년 미 상원에서 일본에 대해 한인의 자결권을 지지하는 결의안이 채택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만큼 사진이 갖고 있는 파급력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북로군정서'(상단)로 알려졌지만 출처가 불분명. '간도참변'(하단)으로 잘못 알려진 사진 ⓒ우리역사넷 '북로군정서'(상단)로 알려졌지만 출처가 불분명. '간도참변'(하단)으로 잘못 알려진 사진 ⓒ우리역사넷

교과서는 우리 후속세대에게 올바른 역사를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며, 공신력을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교과서의 역사서술상 근거로 사용하는 사진은 그 출처를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이야기하는 내용에 어울린다는 이유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욱이 사실과 다른 것을 속된 말로 잘라내기 식으로 사용해서는 더욱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한국 근현대사 특히 독립운동사 관련 사진 자료에는 아쉽게도 출처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거나 임의로 삽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사진이 사용된 것은 주로 사진의 장면이 교과서의 서술 내용과 어울리는 경우였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청산리 대첩과 관련된 것이다. 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해져 더 이상 사용하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 청산리 대첩과 관련해 사용한 사진이 있다. 그 사진은 최근까지 많은 미디어와 심지어 많은 학생들이 공부할 때 참고하는 한민족대백과사전에도 청산리 관련 항목에 ‘청산리 전투에서 패하고 철수하는 일본군’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1939년 중국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일본군의 독립군 처형'으로 잘못 알려진 사진ⓒ미래엔 '일본군의 독립군 처형'으로 잘못 알려진 사진ⓒ미래엔

청산리 대첩과 달리 여전히 교과서에 사용되고 있는 부정확한 사진은 간도 참변과 관련된 내용과 함께 실려 있다. 간도 참변은 1920-21년의 사건이지만, 이를 설명하고 있는 사진은 장고봉 전투로 알려진 1938년 일본과 소련과의 전투 이후에 촬영된 것이다. 가장 난감한 문제는 사진 원본에 출처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편집해 교과서에 사용한 경우이다. 교과서에 일본군의 독립군 처형 장면으로 실린 사진이 그러한 경우이다. 이 사진은 1차 훈춘 사건의 주범으로 알려진 중국 마적 두목을 다른 마적이 처형하는 사진이다. 일본군이나 독립군과는 사실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일제가 식민지배 기간 중에 저지른 만행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사진을 사용하면서 그러한 사실이 자칫 왜곡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이들이 좀 더 연구에 매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독립운동사와 관련해 많은 선학이 중요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덕분에 독립운동사 뿐만 아니라 일제가 감추고 싶어 한 각종 만행까지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여 동북아에 평화를 정착할 수 있는 올바른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었다. 다만 당시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사진 자료가 희귀했고, 그 출처를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 일부 잘못된 자료가 포함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잘못을 답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은 관련 내용을 직접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를 발굴하는 노력이 독립운동사가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필요한 역할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역사가는 무슨 일을 하는가?” 학문을 업으로 삼고 있는 이들이 한 번쯤 받아봄직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사가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 대답에 부디 신화화와 조작은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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