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페이스북
X
카카오톡
주소복사

광화문 ’재인산성’과 중국 ‘천안문사태’ 뭐가 다른가?


입력 2020.10.07 07:00 수정 2020.10.06 17:24        데스크 (desk@dailian.co.kr)

‘코로나19’, 문재인 정권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수호자

‘아전인수’의 끝판왕…소리 안들리니 민심도 없는 것이라 착각

8.15 광복절 집회 후 코로나19의 폭발적인 확산에도 불구하고 일부 보수단체가 개천절 집회 강행을 예고한 가운데 지난 3일 오전 서울 광화문 세종대로에 경찰들이 차벽을 설치해 통행을 차단하고 있다. ⓒ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8.15 광복절 집회 후 코로나19의 폭발적인 확산에도 불구하고 일부 보수단체가 개천절 집회 강행을 예고한 가운데 지난 3일 오전 서울 광화문 세종대로에 경찰들이 차벽을 설치해 통행을 차단하고 있다. ⓒ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추석 연휴동안 ‘추석 민심’은 없었다. 천하가 태평해서가 아니다. 민심이 소통할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명분은 ‘방역’이었다. ‘사회 소요현상방지’에 비해서는 설득력 있고 고급스런 명분이다. 그런데 왠지 뒤끝이 개운치 않았다. 중국 ‘천안문사태’가 연상됐기 때문이다.


구소련이 붕괴되는 시점 중국에서도 민주화운동이 있었다. ‘천안문(톈안먼)사건’이다. 1989년 6월 4일 미명에 민주화를 요구하며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학생·노동자·시민들을 상대로, 중국정부는 계엄군을 동원하여 탱크와 장갑차로 해산시키면서 발포까지 했다. 많은 사상자가 나왔고 중국에 대한 세계인의 환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당시 공산권 개혁·개방의 상징이었던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중국을 방문해 중·소정상회담이 계획되어 있는데, 이를 취재하기 위해 전세계의 언론이 중국에 몰려들었다. 이들 기자들의 취재가 아니었으면 이 사건은 서방세계에 알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후 지금까지도 이들은 명예를 회복하지 못했고 아직도 민주화 희망은 요원하다. 우리나라 ‘광주사태’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칭송되는 동안, ‘천안문 사태’는 여전히 반역시위로 남아있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차이는 무엇인가? 중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매우 작지만 고도로 개방되어 있다. 그래서 중국식 무력진압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재인산성’이란 차벽을 쌓아 원천봉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고 보면, ‘광장’은 언제 어디서나 기존의 정권에 위험한 장소다. 정권의 이념적 정체성과는 무관하다. 이명박 정부시절 오세훈 서울시장이 광화문광장을 정비·조성하자 청와대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정권차원에서는 청와대와 정부청사 코앞에 광장이 생기면 아무래도 불편하다. 광장에 모이는 이유가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세훈 시장은 밀어붙였고, 결국 광장은 정권의 큰 부담이 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초기 광우병 파동으로 예방주사를 맞아서인지 그럭저럭 넘어갔다. 하지만 그런 요행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중에 그 광장에서 탄핵사태가 벌어졌으니 정권몰락의 씨앗을 배태한 장소가 된 것이다.


문재인 정권 실세들은 그 당시 ‘광장의 수호자’들이었다. 정부가 차벽을 세우면 비난하고 조롱했다. 경찰차를 끌어내려다 물대포에 맞아 희생된 사람까지 생겨났다. 그 ‘피의 대가’가 문재인 정권이다. 문재인 정권이 좋아서가 아니라 박근혜 정권이 싫어서였다. ‘대안부재’였으니 ‘무혈입성’한 것이다. 그러나 집권 후 광장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표변했다.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 선량한 백성들을 개·돼지 취급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말을 바꿨다. 아니 말이 없어졌다. 국민의 목소리를 귓등으로 듣고 있다. 집권 과정과 집권 초기에는 직접 광장에 나와 국민과 대화하고 설득할 것이라고 호언했다. 이를 위해 대통령 집무실을 광화문에 설치하겠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청와대 구중궁궐에 숨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있다. 간신과 내시 사이에서 ‘타조 머리박기’식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달콤한 말만 믿고, 쓴소리하는 사람은 협박한다. 그래도 안 되면 잘라버린다. ‘3권 분립’의 주체인 3부 모두에 그런 사람들만 심어놨고,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언론마저 장악하고 있다. 그러니 답답한 국민은 광장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마지막 절규의 장’인 샘이다.


문재인 정권에게 ‘코로나19’는 하늘이 내려준 수호자가 된지 오래다. 지난 4월 총선 초기 불리한 변수일 것이라고 생각한 ‘코로나 사태’가 효자노릇을 했다. 모든 실정과 그에 대한 비판을 빨아들였다. 헌신적인 의료인들과 일부 공직자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K-방역’의 신화를 썼지만, 그들은 패착을 거듭하면서도 그 공을 독식했다. 그리고 ‘공포정치’를 이어갔다.


지난 8.15 광화문집회는 ‘마녀사냥의 장’이 되었다. ‘합리적인 이론(異論)’이 있어도 공포에 질린 국민들을 인질삼아 정권은 마녀사냥을 계속했다. 광화문광장 바로 옆 종각에서 민주노총이 수칙을 어기며 불법적 집회를 열었던 것을 문제 삼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나아가 집회에 간여치 않은 야당에게 그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 ‘유치한 정치공세’였지만, 코로나 사태는 사람들이 이성을 흐려 놨다. 당연히 반론은 소수의견이 되고 힘을 잃었다.


이번 추석연휴 때도 ‘방역수칙을 지키며 목소리를 내겠다’는 국민들을 철저히 통제하고 억압했다. 방역수칙을 준수하는 ‘1인시위’와 ‘자동차시위’는 법원이 허용했지만, 문재인 정권은 원천봉쇄로 화답했다. 국민에게 주최 측을 역도로 몰았다. 광화문광장에 차벽을 설치하고 만여 명의 경찰병력을 동원했다. 차벽에 갇혀 섬이 된 광화문광장은 을씨년스럽다 못해 해괴해 보였다. 그 동안 정작 위험도가 더 높은 다른 지역의 방역은 방치되고 말았다. 수도권의 놀이시설과 유원지는 사람이 넘치고, 방역수칙이 외면되는 경우가 많았다. ‘정권수호’를 위한 병력을 ‘민생수호’를 위해 썼다면 국민이 위험이 노출되는 일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은 5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우려가 컸던 개천절 집회가 코로나 재확산을 유발하지 않게 철저하게 대기해 빈틈없이 차단했다”고 자화자찬했다. “경찰도 방역에 구멍 생기지 않도록 방역에 최선을 다했다”며 치하했다. 또 “시민들께서 적지 않은 교통 불편을 감수하면서 협조해주셨다”며 “이번 연휴기간에서 안전사고가 많이 준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아전인수’의 끝판왕이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민심도 없는 것이라 착각하는 것 같다.


최근에는 강경화 장관의 배우자 소식이 민심을 뒤흔들고 있다. ‘개인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절대적인 자유는 아니다’라고 했던 사람이 강경화 장관이다. 국민에게 해외여행 자제를 권고하면서다. 그런데 그 시간에 그의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외유를 다녔고, 이번엔 호화 요트를 사러 미국으로 출국했다. 그것도 자신의 SNS에 ‘남 눈치 보며 살수는 없다’는 메시지를 남기면서다. 출국장에서 기자에게 “‘어른이니까’ 놀러가지 말아야 한다 그런 건 아니다...내 삶을 사는 건데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때문에 그것을 양보해야 하느냐”며 “모든 걸 다른 사람 신경 쓰면서 살 수는 없지 않느냐”고도 말했다. 귀를 의심케 하는 소아병적 반응이다. 이런 사람들이 방역을 위한다며 광화문에 산성을 쌓아 국민의 절규를 막고 있다. 묵묵히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국민의 염장을 지른 것이다.


보통국민은 광장에 나가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지만 ‘벙어리 냉가슴’이다. 광화문 ‘재인산성’이 중국의 ‘천안문사태’와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가?


ⓒ

글/김우석 정치평론가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댓글 0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