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美 비축유 5천만 배럴 방출 지시…韓·中·日 등도 참여
산유국 공조 없이는 '유가 잡기' 어려워…단기 효과 가능성 제기
치솟는 유가에 미국이 전략비축유(SPR) 방출 카드를 꺼내들었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인도, 일본, 영국 등도 잇따라 동참하면서 한시적으로나마 글로벌 석유 공급이 확대될 전망이다.
그러나 유가가 제대로 잡히려면 궁극적으로 산유국이 움직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산유국 연합체인 'OPEC 플러스'가 증산 방침에 여전히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만큼 미봉책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다.
24일 업계에 따르면 백악관은 바이든 대통령이 유가를 낮추기 위해 미국 비축유 5000만 배럴 방출을 지시했으며 한국을 포함해 일본, 인도, 영국 등이 동참한다고 23일(현지시간) 발표했다.
이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국제적인 기름값 상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국 정상들과 통화를 하고 이 문제를 논의했다"며 "역대 최대 규모의 비축유 방출 결정을 발표했다"고 밝혔다.
전략 비축유는 경제 봉쇄·사고 등으로 석유 공급이 중단될 경우를 대비해 비축하는 원유를 말한다.
우리 정부는 이번 조치에 대해 "구체적인 비축유 방출 규모와 시기, 방식 등은 추후 구체화할 예정"이라며 "과거 국제에너지기구(IEA) 국제공조에 따른 방출 사례와 유사한 수준에서 결정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국은 2011년 리비아 내전 당시 전체 비축유의 약 4% 수준인 346만7000 배럴을 방출한 바 있다. 이번에도 이와 유사한 4~5% 수준에서 방출 규모가 결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역시 국내 수요의 1~2일분에 해당하는 420만 배럴을 시장에 내놓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인도, 영국 등 나머지 참여 국가를 포함하면 7000만 배럴에 가까운 석유가 방출될 것으로 업계는 예상한다.
미국이 주요 석유 소비국들과 연합으로 비축유 방출을 결정한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1991년 걸프전,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2011년 리비아 내전 등 당시 결정된 비축유 방출은 IEA 주도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미국이 중국을 포함해 여러 나라들에 협조를 요청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로, 그만큼 치솟는 유가를 잡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해석된다.
바이든 대통령은 특히 지난 15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도 비축유 방출을 요청하며 글로벌 비축유 방출 작업에 공을 들였다. 팬데믹 이후 원자재 가격 상승 등에 따른 인플레이션으로 지지율이 떨어지자 위협을 느낀 바이든 정부가 글로벌 공조를 구하면서까지 '유가 잡기'에 힘을 쏟고 있다는 진단이다.
유가는 지난해 초 코로나 발생 이후 경제 둔화로 폭락했다가 같은 해 하반기부터 수요가 살아나기 시작하며 지속적으로 상승해왔다. 석유 제품 수요는 늘었지만 공급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수급 불균형이 발생하는 상황이다.
이에 미국은 산유국에 지속적으로 원유를 증산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OPEC 등은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
아직 팬데믹 여파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글로벌 재봉쇄가 이뤄질 경우 유가가 급락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산유국들은 지난해 코로나 발생으로 유가가 한 때 마이너스까지 추락하며 적잖은 타격을 입은 바 있다.
확실한 회복 시그널이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증산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판단으로 풀이된다.
미국은 이번 비축유 방출이 공급 안정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낼 가능성도 제기된다.
원자재·에너지 분석기관인 플래츠(Platts)는 OPEC 플러스 참여국은 전략 비축유 방출이 결정될 경우 내년 1월 생산량을 오히려 동결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비축유 방출로 석유가 초과공급 상태에 놓이게 되면 OPEC 플러스가 증산 중단 또는 감산을 결정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OPEC 플러스는 내달 2일 회의를 통해 내년 1월 생산량을 최종적으로 확정할 예정이다.
국제에너지포럼(IEF) 조 맥모니글(Joe MacMonigle) 회장은 지난 22일 "OPEC 플러스가 현행 증산 계획을 유지할 것으로 보지만, 전략비축유 방출,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유럽 봉쇄 등 예상 외의 변수가 발생하면 시장 상황을 재평가할 가능성이 있다"며 공급 조절 가능성을 시사했다.
주요 산유국들이 아직까지 비축유 방출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유가 잡기'는 단기 효과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2011년 리비아 내전 당시 미국은 그 해 6월 2064만 배럴의 비축유를 방출했지만 WTI 가격은 배럴당 90달러대에서 등락을 보이다 2012년 1월에 다시 100달러로 올라섰다. 이 기간 두바이유와 브렌트유 역시 100달러를 상회했다.
대한석유협회 관계자는 "글로벌 비축유 방출 조치로 유가 하락 효과가 예상된다"면서도 "산유국들의 공급 확대 등 근본적인 수급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단기 효과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