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탕 폭로전'에 외견상 단일화
더욱 불투명해진 듯 보이지만…
극적 효과를 위해 거쳐야할 극한
대립의 과정일 수 있다는 관측도
3·9 대선의 막판 최대 변수로 꼽히는 야권 후보 단일화가 진흙탕 폭로전으로 번지면서 극심한 산통(産痛)을 겪고 있다.
23일 야권은 단일화 물밑 협상 과정에서 오간 내밀한 대화들이 차례차례 폭로되면서 혼란에 빠졌다.
발단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이날 오전 MBC라디오 '시선집중'에 출연해 "국민의당 관계자 중에 우리측 관계자에게 '안철수 대표 의사와 관계없이 안 대표를 접게 만들겠다'는 제안을 해온 게 있다"며 "지금 굉장히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 중 하나"라고 폭로한 것이었다.
그러자 이달초 이 대표와 비공개 회동을 했던 국민의당 이태규 총괄선대본부장이 발끈했다. 이 본부장은 오후에 긴급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이준석 대표가 윤석열 후보는 인사 그립을 강하게 잡으려는 사람이라 안 후보가 생각하는 공동정부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했다"며 "윤 후보의 측근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조언도 해줬다"고 맞폭로를 결행했다.
사태가 이렇게 번지자 강원도를 돌며 지원유세를 하고 있던 이 대표는 급거 상경했다. 이 대표는 오후 늦은 시각 국회본청에서 연 긴급 기자회견에서 "윤석열 후보는 정치적 거래를 하지 않는 원칙을 가진 사람"이라며 "그렇기에 후보의 의중을 넘겨짚어서 말을 전달하는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이야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갑자기 '진흙탕 폭로전'이 빚어진 배경에는 각자의 정치적 입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대표가 "국민의당 관계자 중에 '안 대표를 접게 만들겠다'는 제안을 해온 사람이 있다"고 말한 순간, 이달초에 이 대표와 비공개 회동을 했던 이 본부장에게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
이태규 본부장은 지난해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후 전개됐지만 결렬된 국민의힘·국민의당 합당 논의 과정에서도 다소 결이 다른 입장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기에, 자신에게 쏠리는 의심의 눈초리는 털어낼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당시 회동 때 오간 대화를 필요 이상으로 상세히 밝히면서 이 대표를 향해 "즉시 (그 발언을 했다는)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밝히라"고 압박한 것은 이러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대표도 이날 긴급 기자회견 과정에서 "이태규 의원은 나와 공식적으로 대화했기 때문에 이태규 의원이 혹시라도 그 대화를 한 인물로 지목될까봐 말한다"며 "(이태규 의원은) 당사자가 아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긴급 회견·급거 상경…폭로전 배경은
이준석 "'安 접게 만들겠다' 제안 있어"
이태규 "발언 당사자 누군지 밝혀라"
이준석 "이태규는 그 당사자가 아냐"
이 점이 분명해지면서 '진흙탕 폭로전' 사태는 일단 더 이상 확산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쌍방 진영, 그리고 지지자들이 받은 감정의 상처만은 그대로 남게 됐다. 외견상으로 보면 야권 후보 단일화는 이날 폭로전 사태로 한 발짝 더 불투명해진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쌍방의 감정 대립이 선을 넘으면서 단일화가 끝내 유산(流産)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지만, 반대로 단일화의 정치적 효과가 배가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수순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안철수 후보는 2011년 출마 포기 및 박원순 전 서울특별시장 지지 선언을 했고, 이듬해에는 역시 출마 포기 및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지지 선언을 했다. 지난해에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국민여론조사 방식의 단일화를 했다.
안 후보가 완주를 하지 않고 단일화를 할 것이라는 게 정치적 변수(變數)라기보다는 상수(常數)처럼 된 것이다. 정치에서 '당연한 일이 당연하게 일어나는 것'은 파급력이 전혀 없다.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극적 반전을 거쳐 일어나야 일반 대중의 표심을 움직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50% 지지율을 받던 후보가 5% 지지율을 받는 후보의 손을 들어주고 사퇴한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2011년 후보 단일화가 가장 파급력이 강했던 이유다. 1년만에 같은 일이 반복됐던 2012년 후보 단일화는 결국 대선 승리에 실패했다.
마찬가지로 지난해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의 국민여론조사 방식 단일화는 '감동'이 상당했지만, 완전히 같은 일을 한 해만에 반복하면 대선 표심에 미치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미미할 수밖에 없다.
'폭로전'으로 인해 쌍방의 감정 대립이 격화되고 단일화가 더욱 불투명해진 듯 하지만, 과거 윤석열 후보와 이준석 대표가 하나가 됐던 '원팀 의원총회' 때처럼 극심한 산통 끝에 극적 반전이 일어난다면 야권 후보 단일화의 정치적 효과는 더욱 배가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극적 효과 '마일리지' 쌓여가는 모습에
범여권, '안철수 X파일'까지 운운하며
단일화의 '감동 김빼기' 밑작업에 나서
"단일화 성공, 대선 끝난 것처럼 될 것"
이날 공개된 사실의 이면도 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간 이른바 '조롱 논란'을 촉발하며 단일화에 번번이 어깃장을 놓는 듯 했던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실은 국민의당 이태규 본부장과 배석자 없이 독대하며 단일화를 논의하는 등 물밑 교감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범여권 지지자들이 막판 결집 양상을 보임에 따라 초박빙의 접전 국면이 이어지고, 대선 투표용지를 인쇄하는 28일이 다가올수록 단일화를 향한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단일화가 유산될지, 산통 끝에 옥동자의 형태로 출산될지 지금으로서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면서도 "단일화가 점점 물건너가는 것처럼 보이다가, 정권교체를 위해 윤석열 후보나 안철수 후보가 통큰 결단을 내리는 모습이 보여질 때 단일화의 파괴력은 비로소 발휘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외견상 단일화가 점점 불투명해지고 있는데도 범여권의 '견제구'가 나날이 거칠어지고 있는 것은 여권에서도 이러한 흐름을 읽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감정 대립이 격렬해질수록 단일화의 극적 효과가 발휘되기 위한 '마일리지'는 오히려 적립되는 것이기에, 단일화가 성사될 경우 표심을 움직일 수 있는 '감동'에 미리 김을 빼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 시작되고 있다는 관측이다.
친(親)이재명·여권 성향의 한 유튜브 채널은 이날 자신들이 '안철수 X파일' 문건을 확보했다며,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단일화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지체없이 이를 공개하겠다고 주장했다.
이는 단일화가 성사될 경우, 극적 성사의 배경에 마치 '안철수 X파일'이 있는 것처럼 흠집을 내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라는 관측이다. 해당 유튜브 채널 스스로도 "극한 대립 후 극적 화해 모습을 연출한다면 모든 언론에게 집중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것"이라며 "정국은 순식간에 단일화 성공으로 이번 대선이 끝난 것처럼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