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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1>] 스토커


입력 2022.05.04 15:00 수정 2022.05.04 15:00        데스크 (desk@dailian.co.kr)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1화 ‘스토커’


경찰서 조사실 의자에 다소곳하게 앉아 훌쩍거리는 여자는 여전히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오후부터 추적추적 내린 가을비에 밤이 되자 기온이 뚝 떨어져 초겨울 날씨를 방불했다. 이제 갓 떡잎을 밀고나온 새싹마냥 앳된 여자는 눈물에 지워져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마스카라를 수습할 경황은 없어보였다. 여자는 훌쩍이는 내내 콧물 훔치는 소리, 이빨 부딪는 소리를 내면서도 형사의 질문에 최대한 성실하게 답변하려고 애썼다.


“저보다 열 살 많은 남자였어요. 처음 취직한 회사의 주임이었죠.”


여자의 얼굴에 공포감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그녀의 몸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지 몰라요. 흑.”


이빨을 부딪으며 간신히 말을 잇던 여자가 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형사2계 김석규 계장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수건을 꺼내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여자가 손수건을 눈자위에 가져가더니 탁자에 엎드려 한동안 어깨를 들썩였다. 맞은편에 앉아 질문을 던지던 오경문 형사는 자꾸만 벽시계에 시선이 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오경문은 시계바늘이 자정을 넘어서자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여자의 어깨 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것을 본 김석규가 재빨리 오경문의 팔을 툭 치며 눈짓으로 제지했다. 조사실 안을 모니터하는 형사 둘은 저녁에 마신 술 때문인지 너무 늦은 시간 때문인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지구대에서 처음 마주친 여자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맨발로 아스팔트길을 얼마나 달렸는지 찢어진 스타킹 사이로 삐져나온 발가락 끝에 시뻘건 피가 맺혀있었다. 여자는 장의자에 주저앉아 꺽꺽, 딸꾹질 섞인 울음소리만 낼 뿐 말문을 열지 못했다. 마치 엄청난 충격으로 말하는 걸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그게 세 시간 전이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많이 진정된 상태였다.


“업무를 하나하나 자상하게 가르쳐주는 게 좋았어요. 하나뿐인 오빠와는 정반대 타입이라 호감이 생기더군요.”


고개를 든 신예지가 손수건을 꼭 쥔 채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녀의 아래턱과 입술이 불규칙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신예지는 변동원 주임의 곱상한 외모와 자상한 마음 씀씀이에 이끌려 가끔 차와 식사를 함께 하다가 급기야 깊은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신예지는 결혼을 염두에 두고 진지하게 만남을 이어갔다. 그녀는 난생 처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준 변동원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었고, 또한 스스로도 물 오른 나무가 되었다. 참으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나날이었다.


신예지의 헌신적인 사랑을 확인하게 된 변동원은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자신이 쳐둔 사랑이라는 올가미에 물고기 한 마리가 제대로 걸려든 것이었다. 잡아둔 물고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 했던가. 자신의 사랑이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신예지를 보며 변동원은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변동원은 여성 편력이 있는데다 집착이 강한 인물이었다. 변동원이 먼저 걷어차지 않는 이상 여성이 자신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떠나보내지 않았다. 여성에게 싫증을 느껴야 변동원은 호의를 베풀 듯 떠날 자유를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여성은 감지덕지하며 서둘러 그의 곁을 떠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변동원은 곱상한 외모와 달리 폭력적인 성향이 다분했으며, 특히 술을 마시게 되면 폭력의 정도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하루는 상춘객들이 즐겨 찾는 사찰에 들렀다가 민속주점에서 토속음식과 곁들여 동동주를 마시게 되었다. 취기가 오르자 변동원의 손이 무람없이 신예지의 치마 속을 더듬었다. 한껏 욕정이 오른 변동원은 서둘러 주차장에 세워둔 승용차로 가자고 재촉하더니 승차하기 무섭게 카섹스를 강요했다. 신예지는 불교를 믿는 건 아니지만 사찰 앞에서 섹스를 한다는 게 도무지 마음 내키지 않았다. 또한 저녁 무렵이긴 하나 사람들의 시선 역시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예지가 완곡하게 거부의사를 밝히자 이미 욕정의 포로가 된 변동원은 거칠게 그녀의 속옷을 벗기려 했다. 신예지는 무릎에 잔뜩 힘을 주고 버티다가 변동원에게 주먹으로 몇 차례 얼굴을 얻어맞고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신예지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변동원이 욕정을 풀고 난 뒤끝이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변동원이 두 손 모아 싹싹 빌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신예지는 그게 악어의 눈물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변동원은 폭행 후 반성과 사과를 반복했고, 한동안은 지극정성으로 신예지를 대했다.


물론 이후에도 신예지는 크고 작은 이유로 변동원에게 폭행과 학대, 인격모독을 당했지만 그와의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변동원이 반복적으로 흘리는 악어의 눈물은 마음 여린 신예지의 모성애를 자극했고, 그녀는 그걸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변동원이 새로 입사한 여직원에게 상냥하고 친절한 모습을 보이자 신예지는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예전 자신에게 다가서던 모습과 놀랍도록 흡사했다. 이튿날 신예지는 회사 직원휴게실로 변동원을 불러내어 단호하게 이별을 통보했다.


“누구 맘대로 떠나! 내가 허락하기 전엔 절대 못가!”


변동원은 불같이 화를 내며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둘렀다. 손과 발을 가리지 않았고 장소를 가리지 않았던 폭행은 동료직원들이 달려와 뜯어말리고서야 겨우 멈춰졌다. 신예지는 그날 이후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고 신경질적으로 걸려오는 변동원의 전화를 아예 받지 않았다.


박태갑 소설가 greatop@hanmail.net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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