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43화 사나이 순정
참담한 심정으로 홀트 아동복지회를 벗어나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던 방선희는 문득 시내 유흥가 근처까지 온 자신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한때 예닐곱 명의 아가씨들을 거느리고 고급 룸살롱을 나가던 마담이었기에 방선희는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얼른 발길을 돌렸다.
결국 방선희가 찾아간 곳은 우포늪으로 유명한 작은 도시 창녕이었다. 강주에 내려가기엔 많은 용기가 필요해서 차선책으로 인근 도시를 하나하나 짚어보다가 느닷없이 우포늪을 떠올렸는데 아마 대학 때 이철백과 함께 완행버스를 타고 여행했던 기억이 아스라이 남아있었기 때문인 듯 했다. 방선희는 군청 근처 음식점에 취업하여 홀 서빙을 담당하다가 그녀의 미모를 눈여겨 본 노래주점 사장의 간청으로 탬버린을 치는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겸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보니 부업이 주업보다 수입이 훨씬 나았다. 그래서 방선희는 아예 도우미로 전업해서 본격적으로 돈을 벌었고 이윽고 술집 하나 내고도 남을 돈이 쌓이자 강주로 입성하게 된 것이었다.
홍 기사는 고맙게도 하루가 멀다 하고 블랙&화이트를 찾아와 주었다. 더욱이 방선희가 애타게 그리던 이철백을 연결시켜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방선희는 오래 전 마담을 할 때 택시기사 이철백의 근황을 우연히 전해들은 게 있었는데 마침 홍 기사가 택시 일을 한다기에 큰 기대 없이 질문을 던졌었다. 그런데 이철백이 홍 기사와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는 동료기사라는 말을 듣는 순간 방선희는 기쁨과 놀라움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이철백과 재회한 방선희는 고마움을 보답하는 차원에서 한결 더 정성을 쏟아 홍 기사를 대해주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전보다 더 신경 써주며 나긋나긋한 방선희의 태도가 그만 홍 기사의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항상 이철백과 함께 블랙&화이트를 찾아오던 홍 기사가 언제부턴가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상태로 혼자서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방선희는 호출하지 않아도 먼저 테이블에 다가가 홍 기사의 술 파트너가 되어주었다. 홍 기사는 맥주를 홀짝거리며 방선희의 모성애를 자극하려는 건지 신세한탄을 하려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신파조를 읊조리고는 했다.
홍 기사는 늦게 결혼해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그중 큰아이가 자폐증을 앓고 있었다. 홍 기사의 아내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적으로 육아에만 매달렸다. 작은아이가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 큰아이의 교육치료 프로그램을 다녔고, 어린이집이 끝나면 작은아이를 데리고 귀가해서는 쉴 틈도 없이 집안일을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녹초가 되어버린 아내는 당연히 홍 기사에게 신경을 쓸 수 없었다.
홍 기사는 그게 늘 불만인지라 술 마시고 퇴근한 날이면 아내에게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아내는 걸쭉한 지청구와 더불어 신세한탄을 사설처럼 하염없이 읊었는데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모르겠다며 손으로 방바닥을 치고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다며 하늘대신 천정을 올려다보더니 제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홍 기사는 아내의 한탄이 딱히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겨냥하지 않은 것이라고도 할 수 없어 기분이 더럽게 나빴다.
그 이후로 홍 기사는 아내에게 침묵하고 그 대신 술에 탐닉했다. 물론 그 전에도 술을 탐닉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전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본격적으로 술독에 빠져들었다. 그렇잖아도 큰아이 때문에 힘겨워하던 홍 기사의 아내는 허구한 날 고주망태가 되어 귀가하는 남편에게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거기다 맞벌이에서 외벌이로 바뀌면서 겪게 된 경제적인 문제는 부부싸움의 불쏘시개로 작용하기에 충분했다.
홍 기사는 자신보다 한 살 더 많은 방선희가 누나처럼 포근해서 좋다고 말했다. 방선희는 사람이 힘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홍 기사를 전보다 더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그런데 홍 기사는 그걸 오해했는지 방선희가 호감을 갖는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차츰 노골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전화나 문자가 이상하게 잦아진다 싶더니 말투나 행동이 대담해지면서 방선희에게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었다. 여자의 육감으로 방선희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언제부턴가 홍 기사가 나타나기만 하면 방선희의 심장은 어김없이 비정상적으로 쾅쾅 뛰었다. 아마도 노이로제에 단단히 걸린 것 같았다. 급기야 방선희가 직접 말하거나 이철백의 입을 빌리거나 해서 이제 그만 좀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수차례 애원했지만 홍 기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꾸역꾸역 나타나 혼자서 양껏 술을 마시다가 그대로 엎어져 곯아떨어지곤 했다. 그러면 방선희의 호출을 받은 이철백이 홍 기사를 택시에 태워서 귀가시켜주었다. 그러다가 홍 기사가 당장이라도 이혼을 불사할 테니 자신과 결혼해 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상황에 직면하자 방선희는 첫사랑 이철백과 동거하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 방법만이 홍 기사의 집착을 끊고 미련마저 뿌리 뽑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철백과 방선희가 동거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홍 기사는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무 말 없이 블랙&화이트를 걸어 나갔다. 사나이 순정이란 게 저럴까 싶어 방선희는 마음이 짠했다. 이후 택시회사마저 그만둔 홍 기사는 더 이상 블랙&화이트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철백은 가끔 홍 기사가 어떻게 사는지 그의 소식이 몹시 궁금하기도 했지만 방선희를 배려해서 따로 연락하지는 않았다.
이철백은 요즘 김석규의 주장을 화두로 삼아 고민 중이었다. 지난번 면회에서 김석규는 엉뚱하게도 술에 관한 국가의 책임을 거론하고 나섰다. 국가는 국민의 건강한 삶을 보장하고 보호해야 하는데 주류(酒類) 기업과 사회가 음주를 조장하고 권장하는 것에 대하여 국가가 방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24시간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술을 구매할 수 있게 해놓고 술 취해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심신미약 사유를 들어 감형까지 시켜주고 있으니 이게 음주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지원이 아니고 뭐냐는 것이었다.
“그 결과 국민의 알코올중독으로 가정이 해체되고 있는데도 국가는 모르쇠로 일관하지.”
김석규는 국가가 금주 교육과 캠페인에 적극 나서고 알코올의존증에 대한 치료는 전적으로 국가의 부담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