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행정구역서 복수 의원 선출하는
송파·수원·천안 등은 중대선거구…
유권자 지역정체성에 부합하는 방향
새해 정치권의 핵심 화두로 떠오른 중대선거구제 논의의 모델이 도시는 중선거구, 농촌 지역 등은 소선거구를 채택하는 이른바 도농복합형 중대선거구제로 구체화되고 있다. 취지는 좋지만 정치적 유불리가 너무나 뚜렷해 현실화 과정에서 다양한 정치적 타협과 절충의 시도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관련 논의에 불을 당긴 윤석열 대통령은 신년 인터뷰에서 "소선거구제는 전부 아니면 전무로 가다보니 진영이 양극화되고 갈등이 깊어졌다"며 "지역 특성에 따라 2~4명을 선출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중요한 전제는 "지역 특성에 따라"다. 신년 인터뷰를 보도한 매체도 "지역 따라 중대선거구제 검토"라고 제목을 달았다. '지역 따라'가 생략될 수 없는 중요한 전제라는 의미다. '지역에 따라서' 일부 지역만 선별적으로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자는 의미라면, 이것은 이른바 '도농복합형 중대선거구제'를 제안한 것으로 해석된다.
도농복합형 중대선거구제는 윤 대통령이 새롭게 창안한 모델은 아니다. 정치권에서 선거구제 개편이 화두가 될 때마다 부상했던 소재다. 도시 지역은 국회의원 2~5인을 선출하는 중대선거구제를 하되, 도시화되지 않은 농촌 지역 등은 현행대로 국회의원을 1인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는 방안이다.
하나의 행정구역에서 복수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도시 지역이라면 중대선거구제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다. 현재 갑·을·병에서 3인을 선출하는 서울 송파구가 송파 전체가 하나의 지역구가 되면서 3인 선거구가 되는 식이다. 갑·을·병·정·무로 나뉘어진 경기 수원이 5인 선거구, 갑·을·병으로 나뉘어진 충남 천안이 3인 선거구가 될 수 있다.
도농복합형 중대선거구제는 사표 최소화 등의 중대선거구제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지역구 광역화에 따른 유권자 동질성 훼손과 인지도 정치·금권정치라는 단점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로 정치권의 주목을 받아왔다.
중대선거구제의 최대 단점은 지역구의 면적이 넓어지면서 유권자의 동질성이 훼손되고 인지도 정치·금권정치가 판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도농복합형 중대선거구제를 하면 하나의 행정단위 안에서만 국회의원 지역구가 통합되므로, 유권자의 혼란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유권자들의 지역정체성에 부합하는 결과가 나온다.
정치권 관계자는 "국민들은 자기 스스로를 '나는 송파주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있어도 '나는 송파병 주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없다"며 "자기가 사는 곳이 천안갑인지 을인지 모르는 국민들이 절대다수이기 때문에, 행정구역 안에서 중선거구로 통합하는 것에는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바라봤다.
전북의 경우, 전주는 갑·을·병이 3인 중선거구로 통합되는 반면 완주·진안·무주·장수는 그대로 소선거구로 유지된다. 경북도 구미나 포항은 갑·을이 2인 중선거구로 통합될 수 있지만, 지금도 지나치게 광대한 군위·의성·청송·영덕은 인구 하한 기준만 맞춘다면 1인 소선거구로 유지될 수 있다.
정치적 유불리 뚜렷…민주당에 불리
박홍근 "철저하게 계산된 이야기"
尹 원래 지론이라지만…과연 믿을까
다만 취지가 좋은 것과 현실정치에서 관철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도농복합형 중대선거구제를 채택하면 인구가 밀집된 서울·수도권에서는 4~5인의 중대선거구까지도 다수 탄생하는 반면, 영·호남은 기껏해야 2~3인 선거구가 생기는 정도고 대부분은 1인 소선거구가 유지된다.
이 뜻은 65석 국민의힘 '텃밭' 영남과 28석 더불어민주당 '텃밭' 호남 사이의 의석 불균형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는 가운데, 121석이 걸린 서울·수도권에서만 민주당이 많은 의석을 국민의힘에 내줘야 한다는 의미다.
현재 국민의힘은 영남 65석 중 58석, 민주당은 호남 28석 중 24석을 차지하고 있다. 121석 서울·수도권은 민주당이 100석, 국민의힘이 19석을 점하고 있다. 민주당이 서울·수도권 중심으로 중선거구를 하자는 도농복합형 중대선거구제 제안의 저의에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가 도농복합형 중대선거구제를 가리켜 "철저하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계산된 이야기"라며 "선거 제도를 정치적 유불리를 가지고 접근해서야 되겠느냐"고 펄쩍 뛴 것은 이러한 맥락이다.
박 원내대표는 "예를 들어 영남 같은 경우는 중대선거구제가 도입되면 국민의힘에는 불리하다고 볼 것이고, 호남은 (영남보다) 의석 수가 상대적으로 적다"며 "수도권은 지금 민주당이 기반이 강하다보니까 (영·호남은 중대선거구를 하지 않고) 수도권에서만 하면 훨씬 더 (국민의힘)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셈법으로 접근을 하는 것 아니냐. 그것은 우리 (민주당) 안에서 동의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일축했다.
국민의힘 의원실 관계자는 "대통령도 '중대선거구제를 통해서 대표성이 좀 더 강화되는 방안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면서 '정치 시작 전부터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왔다'고 부연했더라"며 "지금 새삼 총선을 앞두고 계산기를 두드려본 게 아니라 원래부터 자신의 지론이라는 해명이지만, 과연 야당이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겠느냐"고 의문을 표했다.
정진석 "행정구역 개편 논의돼야"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엮이면서
향후 뜻밖의 절충안 탄생할 수도
도농복합형 중대선거구제를 채택할 경우 중대선거구 채택 여부의 전제가 되는 행정구역도 문제다.
111만 인구의 울산은 1997년 광역시로 승격돼 휘하 구(區)들이 모두 기초자치단체인 자치구다. 따라서 중대선거구제가 채택돼도 갑·을 2인을 선출하는 남구가 2인 중선거구로 개편될 여지가 있는 것 외에는 이론상 모두 1인 소선거구가 유지된다.
반면 119만 인구의 수원은 경기도 휘하의 기초자치단체이기 때문에 중대선거구제가 채택되면 갑·을·병·정·무가 하나로 묶이면서 5인 대선거구가 되거나, 3인 중선거구 하나와 2인 중선거구 하나로 묶일 가능성이 있다.
민주당 의원실 관계자는 "행정구역에 따른 대표성 문제는 인구 2만4000명의 경북 청송군은 군수를 주민들이 직선할 수 있는데, 인구가 그 20배인 48만 명의 경기 성남시 분당구는 왜 구청장을 주민들이 못 뽑느냐는 문제 등 지방선거에서부터 이미 문제가 돼온 사항"이라며 "중대선거구 채택 여부를 기존 행정구역에 따라 하게 되면 이 문제가 총선 대표성 문제로 번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선거구를 광역화해서 복수의 국회의원을 뽑겠다면, 행정구역 개편이 함께 논의돼야 한다"며 "도(道)를 없애고, 몇 개의 광역단체로 묶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2단계 행정구조로 축소하는 게 옳은 방향"이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도농복합형 중대선거구제 논의의 현실화 전망은 어떨까. 줄기차게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주장해온 세력과의 절충안이 마련될 여지가 있는 것은 긍정적 요소다. 반면 현 정권의 '정치적 셈법'을 의심하는 기류가 여전한 것은 부정적 요소다.
도농복합형 중대선거구제로 국회의원 선거구를 개편하는 것은 '판'을 뒤엎는 대폭 개편이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에는 손도 못 댔던 지역구 의석 감축이 시도될 수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현실적으로 국회의원 정수 증원은 무리라고 보고 지역구 200석·비례대표 100석의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역구 225석·비례대표 75석의 '3대1'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절충안으로 등장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선거제도 개혁의) 대안의 하나로 중대선거구제도 제안되고 있다"면서도 "그밖에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포함한 여러 대안을 잘 혼합해 선거법을 새롭게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논의 과정에서 '혼합'과 '절충'이 시도된다면, 도농복합형 중대선거구제를 채택하는 대신 지역구 일부를 감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강화하는 정치적 타협안이 부상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