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영화가 영화라는 대중예술 자체를 스스로 조명하고 돌아보는 영화가 나왔다. ‘거미집’(감독 김지운, 제작 앤솔로지스튜디오, 공동제작 바른손스튜디오·루스이소니도스, 배급 ㈜바른손이앤에이)이다.
영화 ‘거미집’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충무로’(once upon a time in 충무로, 한국영화의 산실 충무로의 과거 어느 한때)를 외피로, 구체적으로는 1970년대 한국영화 촬영현장을 배경으로, 연출과 연기 작업의 본질에 관한 모색을 통해 ‘영화란 무엇인가’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모호하게’가 아니라 감독과 배우, 제작자와 스태프라는 영화인들을 통해 그들이 영화에 참여하여 영화를 완성하는 과정의 바탕이 되는 욕망을 그려 보임으로써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한다.
완성된 결과물만 보던 우리 관객들은 마치 창작자 체험을 하듯, 영화 현장에 들어가 영화가 어떠한 고민 속에서 어떻게 촬영되고 만들어지는지를 지켜보는 기회를 얻는다. 흔치 않은 경험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관점에서도 ‘영화의 위대성’,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영화인들의 진정성’에 대해 이보다 더 감각적으로, 이보다 더 힘주어 말하기는 어렵다 싶게 강렬하게 웅변한다. 값진 기회다.
그 신선도만큼 낯설 수 있어서, 관객이 영화로 진입하는 ‘문턱’이 높을 수도 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배우들, 명배우들이 문턱을 낮췄다. 송강호, 오정세, 임수정, 정수정, 박정수, 전여빈, 장영남, 김민재, 장광, 김동영, 정인기 등이 한마음 한 호흡으로 힘을 합했다. 정우성은 ‘특별출연’답게 짧은 출연에도 특별히 큰 힘을 보탰고, 염혜란은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부부로 호흡을 맞췄던 오정세(톱스타 배우 강호세 역)의 부인 역으로 깜짝 등장해 큰 웃음을 준다.
영화는 김열 감독이 이미 촬영을 마친 영화 ‘거미집’의 결말을 바꾸면 걸작이 될 것이라는 집념에 사로잡혀 집요하게 재촬영을 강행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영화 속 영화의 제목도 ‘거미집’이지만, 우리에게 흑백으로 보여지는 데다 1960~70년대 한국영화의 문어체 말투로 발화하기 때문에 전혀 헷갈리지 않는다.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의 배경과 인물 설정은 마치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화녀’(1971), ‘충녀’(1972)가 중첩된 위에 창작이 더해진 형국이다. 영화 속에서 ‘거미집’을 촬영하는 ‘영화 속 현실’의 김열 감독이나 제작사 신성필림의 대표와 직원들, 신성필림 전 대표이자 김열이 조감독 시절 모셨던 신상호 감독 등은 1970년대 재원 부족과 검열이 엄존하는 열악한 제작환경 속에서 예술적 도전에 순수한 열망을 잊지 않았던 대선배 영화인들을 대표한다.
만일 영화 ‘거미집’의 탄생 의미가 ‘영화인, 그들만의 리그’에서 그친다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그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되고.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을 때 그 존재 의의가 있다. 가까이 가면 델 것처럼, 영화와 영화 속 영화 모두에서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는 화마처럼 뜨거운 그들의 고뇌와 선택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 깊은 울림을 준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들이 그러했듯 영화 ‘거미집’에는 곱씹어 생각해 볼 대사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두 가지를 소개한다. 우리 인생에 곧장 대입해 볼 수 있는 명언은 영화 속 두 감독, 김열(송강호 분)과 신상호(정우성 분)의 입을 빌어 우리에게로 온다.
“재능이란 게 뭐 별것 있나. 자신을 믿는 게 재능이지. 지금 자네 눈앞에서 흐릿하게 어른거리는 게 있다고 했지? 그걸 믿고 가. 그게 누구 딴사람 머리에서 나와서 어른거리는 게 아니잖아.”(감독 신상호)
고뇌하는 김열 앞에 홀연히 나타난 선배 감독 신상호. 영혼이지만 생생하고, 영혼이어서 더욱 절대적 진리처럼 들리는 스승의 말이다. 천재라 불렸고, 김열 자신은 아무리 달려봤자 그 발뒤꿈치도 못 따라갈 것 같은 열등감을 유발하는 상대. 그가 말한다. 자신을 믿는 게 재능이다! 선명하지 않을지라도, 자신 없어도, 딴 사람 아닌 내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대로 행동하라. 왜? 내 인생, 내 선택이니까!
스스로 재능이 뛰어나다, 재능이 많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잘되기엔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지레 위축돼 사는 세상의 많은 사람에게 신상호가 말한다. 너 자신을 믿는 게 재능이다. 나를, 내 선택을 믿는 자신감.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니, 실천할 수 있다면 재능 맞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갑자기 나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건 어려워도, 나를 믿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넌 한 번이라도 카메라 앞에서 진심이었던 적 있었어? 난 배우가 진짜로 하는 연기를 보고 싶은 거야. 그게 나만을 위해서 그런 거야? 배우도 그 큰 스크린에서 자기가 거짓말하는 걸 봐봐. 안 끔찍해? 서로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그런 거야. 난 그거밖에 없어.”(감독 김열)
선배를 멘토로 삼았던 후배 감독 김열이 이제 배우 강호세(오정세 분)의 멘토를 자처한다. 성장이다. 넌 한 번이라도 진심인 적 있어? 무섭게 아픈 말이다. 우리는 늘, 진심이라고 생각하며 살지 않나. 누굴 좋아하든 미워하든, 공부나 하는 일이 재미있든 지겹든 나의 마음을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김열의 질문은 진짜 그것이 진심이냐고 되묻는다.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할 자신이 없다.
무의식적 진심이었다. 목적을 상정하지 않은 태도였다. 내 인생을, 상대를 내가 거짓으로 대하는 끔찍함에 직면하지 않기 위해 진심이어야 한단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진심이어야 한다. 인생, 진심 그것밖에 없다고 김열이 단언한다. 사람 사는 데 사랑이 제일 중요해, 인생에 돈이 최고야, 이런 말은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 ‘인생에 진심 그것밖에 없다’라는 말이 귀에 쟁쟁 울린다.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고, 나의 본분에 진심을 다하고, 내가 하는 일에 진심으로 임한다는 것. 성심(誠心), 보통 어려운 실천이 아니다.
종종 해답이 보이지 않는, 인생이 낸 문제에 부딪힐 때 필자는 영화를 본다. 거짓말처럼 영화 안에 답이 있다. 어느 때엔 기적처럼 첫 번째 영화에서 만날 때도 있고, 어떨 땐 서너 편을 넘어서도록 마주치지 못할 때도 있다. 오랜 경험의 공통점은 ‘예술’의 경지에 오른 작품에는 반드시 들어있다. 그 영화의 주제 의식과 맥을 같이 하지 않더라도 인생의 본질을 꿰뚫는 명언이 담겨 있다.
영화 ‘거미집’에서도 만났다. 단지 좋은 감독이 되는 것에 국한하지 않는 ‘나를 믿는 재능’, 단지 참된 연기에 국한하지 않는 ‘후회를 막는 진심’. 영화를 건너 인생을 파고드는 명언,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