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맛보는 후련한 카타르시스 ‘1947 보스톤’으로 돌아온 감독 강제규
“임시완, 얼굴부터 달리는 주법까지 마라토너…과한 연기 하는 배우, 아니다”
더 많은 눈물을 더욱 뜨겁게 흘렸다. 같은 영화를 두 번째 보면서 이럴 일인가 싶을 만큼 몰입했다. 아마도, 긴장감 감도는 언론시사회가 아니라 평안한 극장에서, 알든 모르든 눈에 보이지 않는 관객들과 마음을 나누며 본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한가위 연휴 가족, 지인들과 영화 ‘1947 보스톤’(감독 강제규, 제작 ㈜비에이엔터테인먼트·㈜빅픽쳐,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콘텐츠지오)을 관람했다. 영화에 관해 어떠한 정보도 공유하지 않은 채 봤고, 결말을 전혀 모르고 본 이는 영화 후반 감격과 환희 속에 감상한 후 “이게 실화냐. 우리가 이런 감격의 역사를 모르고 있었던 거냐”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다 함께 만족한 발걸음이었다.
첫 번째 관람에서 1947년 보스톤국제마라톤에서 세계인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대이변을 일으킨 서윤복(임시완 분)이 돋보인다면. 다시 보니, 태극기 달지 못하고 남의 나라 국적으로 뛰었던 치욕을 다시 겪게 할 수 없다는 일념 아래 서윤복을 위시한 육상구락부 후배들을 강인하게 단련시키고 이끄는 손기정(하정우 분)이 크게 보인다.
영화에서 손기정(하정우 분)은 사건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심각하게는, 2시간 29분 19초 2라는 마라톤 세계신기록으로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수상대에 섰을 때 월계수나무로 가슴팍의 일장기를 가렸고. 가볍게는 10년 뒤, 손기정 세계제패를 기념한 제1회 마라톤이 서울에서 열릴 때 금·은·동 메달을 수여해야 함에도 술 먹고 지각했다.
유일한 보스톤 마라톤 기대주 윤복이 남승룡(배성우 분)이 어렵사리 마련한 돈 받고 뛰는 걸 용인할 수 없어 대쪽 같은 성미로 판을 깨고. 나라의 쌀을 쥐새끼처럼 빼돌려 배를 채운 부자들에게 머리 숙일 수 없어 들이받는다.
그래서 결국 그 타협 없는 원칙과 정정당당한 태도로 서윤복의 가슴에 진정한 스포츠정신을 심어주고, 목숨 걸고 42km를 달려 고국 그리스에 승전보를 전했던 마라톤정신으로 미국의 독립을 상징하는 보스톤에서 태극마크를 거머쥐는 큰일을 해낸다.
민족의 영웅 손기정을 틀에 박힌 위인의 프레임으로 미화하지 않은 게 좋고, 영화 내적으로도 하정우가 연기한 손기정이 이야기를 굴리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문득 드는 의문. 감독 강제규는 왜, 뻔하지 않은 영웅 캐릭터에 배우 하정우를 기용했을까. 특유의 개성적 표현과 어떤 순간에도 놓치지 않는 유머를 표출하는 하정우가 손기정으로 분했을 때 어떤 플러스 요인이 있다고 본 것일까.
“미국 드라마 ‘옐로우스톤’의 케빈 코스트너만 봐도 우리가 봐온 이미지가 아니잖아요. 배우 생태계는 그런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색다른 역할이 맡겨지면 얼마든지 해내는 이들인 거죠. 제가 그동안 하정우의 출연작들을 통해 (기자가 얘기한) 그 면만 봐왔느냐, 아닙니다. 안중근, 이순신도 가능한 배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표현 사이사이에 보였죠. 제가 더 걱정했던 것은 그것보다는, 사실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은 배우가 손발 묶인 상태에서 표현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정우가 선뜻 하겠다고, 꼭 도전해 보고 싶다고 해서 고마웠죠. 작품에도 배우에게도 서로에게 기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염려는, 촬영 초반 보니까 우리 영화에서 손기정 캐릭터가 너무 비호감인가 싶게 딱딱하고 드라이한 거예요. 정우, (배우로서 이미지) 괜찮겠어? 물으니 무슨 상관이냐고, 작품이 원하는 바면 된다더라고요. 지혜로운 배우인 것은 변화, 진화하더라고요. 캐릭터에 맞는 설정과 감정을 유연하게 뿜어내서 캐릭터를 호감형 인물이 되게 하더라고요.”
한 방 맞았다. 질문에서부터 기자의 시야가 좁음이 표가 났다. 기존에 배우 하정우가 쌓아온 이미지에 국한하여 감독 강제규는 어떻게 거기서 손기정을 보았을까만 생각했는데, 틀렸다. 강제규 감독은 이미 하정우 연기의 행간에서 안중근, 이순신과 같은 위인도 가능한 배우임을 알아봤다. ‘배우 생태계’에서 살아남아 피라미드의 정점에 이른 연기자의 능력치를 꿰뚫고 있었다.
강제규 감독은 배우가 잘한 것에 대해 ‘나의 디렉팅’이라는 자찬을 경계했다. 연출의 범주 안에 있으나 결과는 모두 배우의 노력과 표현 덕분이라며 배우를 호평했다. 영화 ‘1947 보스톤’을 통해 ‘인생 연기’의 역사를 새로 쓴 배우 임시완에 대해서도 그랬다.
임시완은 보이그룹 ‘제국의 아이들’ 멤버였음을 잊은 사람이 많을 만큼, 그냥 배우 임시완으로 이미 자리매김했다. 일찍이 드라마 ‘미생’(2014)을 통해 연기에 얼마나 열심인지, 캐릭터를 얼마나 맛있게 만드는지, 섬세한 표현에 얼마나 뛰어난지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이후 악역이면 최대치로 극악무도하게, 선역이면 우주 최고의 맑음으로 보는 이의 마음에 걸린 빗장을 열었다.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사실에 토 달 사람 없게 표현력 좋은 임시완이지만, 대부분 그 뜨거움과 역동성에 찬사를 보내지만, 더러 한계까지 도달하는 표현에 ‘과하다’고 평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영화 ‘1947 보스톤’에서 보여 준 마라토너 서윤복 연기에는 이의제기가 없을 것이라 자신한다.
임시완은 체지방 6%까지 몸을 만들고, 국가대표 마라톤 코치 권은주 씨의 훈련 아래 현실 마라토너처럼 달리는 주법을 독파했으나. 영화 밖에서는 자신을 한계치까지 몰아붙였으나, 영화 안에서는 원래 그런 몸을 지닌 선수였고 타고나기를 서윤복이었던 것처럼 차분하다. 배우 임시완을, 임시완의 연기력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진짜 마라토너, 서윤복이다.
‘1947 보스톤’의 주인공 서윤복이 아니라 손기정 감독과 남승룡 코치의 지도를 받은 선수, 스승들 옆에서 그들이 뛴 길을 밟아 뛰는 제자처럼 해맑게 서 있다. 대단한 절제력이다.
“제가 이제 권은주 코치한테, 전 국가대표 선수인데, 그분께 제가 한 가지만 요청했어요. 이 선수들이 진짜 마라토너가 됐으면 좋겠다. 배우가 보이면 안 되고, 달리고 호흡하고 표정 짓고 그 모든 게 마라토너였으면 좋겠다, 폼과 자세도 중요하니까요. 가장 기본이 되는 원칙만 드렸음에도 과하지 않게, 넘치지 않게 잘 지도해 주셨어요. 리얼리티는 제가 요청했으나, 최종 디테일에 대한 표현은 임시완 배우가 했습니다.”
“(임시완에게 연기) 톤 다운(tone down) 요청은 없었어요. 실존 인물 얘기니까, 그 사실성에 최대한 근접되고 마라토너로서의 페이스와 룩을 철저히 지켜가는 게 중요하다고만 얘기했습니다. 시완이가 구현해낸 거지요. 과하다…라, 제가 그전에 좀 보니까 그것은 장르적 내용적 특성에 따라 임시완 배우가 변신된 과정을 보여 준 것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작품이 필요로 하면 언제든 담백한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인 거죠.”
한 방 더 맞았다. 부족함도 깨닫고, 뇌에 신선한 자극이 되는 부정. 강제규 감독의 눈으로 배우 임시완을 보면, 임시완의 연기에 과장된 측면이 있었던 게 아니고 작품의 장르와 내용이 그것을 원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번엔 영화 ‘1947 보스톤’에 꼭 맞게, 그 안의 서윤복에 안성맞춤으로 단정하게 흐트러짐 없이 작품의 시작부터 끝을 달렸다.
손기정이 계속 사건을 만들고, 서윤복이 페이스를 유지하며 차분히 달리는 동안 영화 ‘1947 보스톤’은 뒤로 갈수록 힘을 내며 결말을 향한다. 감독 강제규는 의도적으로 영화의 힘을 보스톤에 도착한 이후로 응축시켰다. 흔들림 없는 자신감으로 전반부는 혹독한 편집 다이어트를 통해 속도감 있게 기·승·전개하고, ‘결’에 이르러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오랜만에 후련한 카타르시스와 감동을 맛볼 기회다. 실화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극적으로 재미있는 영화, 아직 연휴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