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전체주의' '반국가세력' 용어 곳곳에서 등장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도 돌연 불붙어
중도층은 탈이념 성향인데 …피로감 역력
'민생 우선' 변화했지만 '이념 논란' 현재진행형
윤석열 정부 집권 후 정부·여당은 이념의 중요성을 연신 외치면서 보수 집토끼 유권자들을 집결시켰다. 하지만 중도확장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수도권은 중도층이 많은 지역적 특성을 가진다. 중도층 유권자는 '탈이념' 계층으로도 평가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후 계속된 '민생보다 이념'이라는 기조는 중도층에 정치에 대한 피로감을 누적시켰고, 결국 이들의 이탈을 불러왔다는 대내외적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국민의힘 안팎에선 '정권 심판' 성격을 가졌던 10·11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원인으로 '과도한 이념 논쟁'을 꼽고 있다. 보선 결과 수도권 중도층의 민심 이탈이 감지되자, 윤석열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소모적 이념 논쟁을 멈추고 오직 민생에만 집중해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도 전해졌다.
10일 정치권에 따르면 강서구청장 보선 패배 이후 정부·여당은 민생 우선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겼다. 공매도 한시 금지와 같은 대형 정책이 예시다. 또한 윤 대통령은 보선 참패 이후 대통령실 참모진들에게 민생현장을 찾아 국민들의 목소리를 청취하라는 주문도 거듭하고 있다. 굵직한 자리에서 '이념'을 우선 강조해왔던 이전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이번 보선 참패 원인과 관련해선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으로 대표되는 이념 논쟁에 정부·여당이 매몰된 것이 하나의 실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 8월부터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 흉상의 거취를 놓고 여야 간 돌연 이념 논쟁이 펼쳐졌다. 강서구청장 보선 직전까지도 해당 논쟁은 계속됐다.
당장 전날 오신환 국민의힘 혁신위원은 채널A '정치시그널' 인터뷰에서 "과거 이념 논쟁의 한복판에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문제가 있었다"며 "그 부분도 큰 영향을 미쳤고 민심이 이반 되는데 가장 중요한 걸림돌이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도 우리 내부에서 논의가 된 바가 있다"라고 말했다.
여권은 홍범도 장군이 과거 스스로 고려공산당 간부라고 자칭하고, 부고장에 '레닌·스탈린당의 충직한 당원'이라 기재된 것을 근거로 육군사관학교 경내의 홍 장군 흉상을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왔다. 당의 일부 의원은 홍 장군에 대해 독립운동을 했더라도 '자유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지향점에 반하는, 엄연한 공산당원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국민의힘 전 당협위원장이 '홍범도는 빨갱이'라는 피켓을 들고 등장하면서 여론은 더욱 악화일로(惡化一路)를 걸었다. 더불어민주당은 군 당국과 정부·여당의 '반민족적 폭거'이자 '매카시즘(반공산주의 운동)'이라고 이를 맞받았다.
다만 여권 내부에서도 이 같은 '이념 매몰'에 대한 우려는 이어졌다. 국민의힘 소속 김태흠 충남지사는 CBS라디오 '뉴스쇼'에서 "해방 이후, 광복 이후의 대한민국이 건국을 하고, 6·25 전쟁과 맞물려 판단을 해야지 그 전의 공산당 가입의 전력을 문제 삼는 건 적절치 않다"라는 입장을 보였다.
홍준표 대구시장도 페이스북에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당시 시대정신을 기준으로 해야지 100년, 200년 지난 현재의 시대상황을 기준으로 평가해선 안 된다"라는 입장을 적었다. 오세훈 서울시장 역시 국정감사에서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장점에 주목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러한 '이념 논쟁'이 격화된 원인은 오로지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에만 있는 있는 것은 아니다. 현 정부는 자유주의와 인권 등 보편적 가치를 내세우고 있는데, 이 때문인지 보선 이전까지 '공산전체주의' '반국가세력'이란 용어가 굵직한 자리에서 등장해 왔다. 흉상 이전 논란 역시 이러한 기조의 연장선이란 관측이 대체적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8월 15일 광복절 축사를 시작으로 민생보다 '이념'을 중요시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이어왔다. 광복절 축사에서는 "우리는 결코 이러한 공산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 추종 세력들에게 속거나 굴복해선 안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8월 28일 국민의힘 연찬회에서는 "제일 중요한 게 이념이다. 철 지난 이념이 아니라 나라를 제대로 끌고 갈 수 있는 그런 철학이 바로 이념"이라는 발언을, 9월1일 국립외교원 6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는 "아직도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그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 반국가세력은 반일 감정을 선동하고 캠프 데이비드에서 도출된 한미일 협력체계가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험에 빠뜨릴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한 정치권 관계자는 "문재인 정권에서 해놓은 것들에 대한 반감이 너무 강하게 작용을 한 것인데, 너무 거기에 우선순위가 매몰돼 버렸다. (동상 이전 문제의) 시동을 걸자말자 풀악셀을 밟아버렸고, 왜 지금 이념 논쟁을 하는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있기는 있었다"며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왜 저렇게 할까' 당황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을 것이고, 주제 선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데 풀어가는 해법에는 문제가 있었다. 차근차근 잘 세팅해 나갔어야 한다"라고 상황을 진단했다.
이어 "우리 경제와 관련해 문재인 정권에서 막아놓은 규제도 얼마나 많느냐. 국회는 입법기관으로 그런 일을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데 그런 입법활동에는 관심이 없고 엄한 곳에 신경을 쏟았다"라고 덧붙였다.
괄목한 것은 여권 내부에서 이제나마 '이념보다 민생'으로 스탠스가 변화했다는 안도의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윤 대통령은 예산안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를 찾아 '이념 대립' 대신 야당 의원들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하고 협조를 요청하는 '소통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타운홀미팅 형식으로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주재하거나 소상공인대회에 참여해 '따뜻한 지원'에 대해 역설하기도 했다.
이 같은 기조 전환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지난주보다 소폭 상승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한국갤럽이 지난 7~9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윤 대통령 직무수행을 긍정평가한 응답은 36%였다. 윤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평가는 직전 조사(10월 31일∼11월 2일) 때의 34%보다 2%p 올랐고, 부정평가는 55%로 직전 조사(58%)보다 3%p 하락했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다만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과 관련한 이념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라 확전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지난달 25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홍범도 장군 순국 제80주기 추모식에 참석했다. 추모식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보낸 근조화환을 참석자들이 거부하며 한때 뒤로 돌려놓는 등 이념 논쟁에 따른 갈등이 표출됐다.
흉상 이전과 관련한 독립운동 유관단체들의 반발 또한 거센 상황이다. 광복회와 한국독립유공자협회,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 등 24개 단체가 최근 결성한 '독립운동단체연합'은 육사 내 홍범도 장군 흉상과 독립영웅실 철거를 전면 백지화 요구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지난 3일 기자단 간담회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에 대해 "이전 문제가 연내 매듭지어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내가 (장관으로) 있는 동안, '육사 내 홍범도 흉상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을 것이고 계속 (이전을) 추진하겠다"면서도 "기대했던 것보단 상당히 시간이 뒤로 갈 것 같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