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 '20년 교분' 동고동락→대립 관계
윤 대통령, '韓과 관계 소원해졌나' 질문에
"정치인으로 확고히 자리매김 했다 생각"
與 '한동훈 전대 등판' 가능성에 의견 분분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뜻밖의 화두에 올랐다. 윤 대통령이 총선 패배 이후 칩거 중인 한 전 위원장과의 과거 갈등 상황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정치인으로서 확고히 자리매김을 했다"는 대답으로 해석의 여지를 남기면서다. 특히 한 전 위원장에 대한 윤 대통령의 답변 의미를 두고 여권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윤 대통령은 9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윤석열 정부 2년 국민보고 및 기자회견'에서 기자들과 73분간 질의응답을 이어갔다. 이 자리에서 한 전 위원장에 대한 질문은 두 차례 나왔다.
윤 대통령은 '한 전 위원장에게 사퇴를 요구한 적이 있는지, 과거에 비해 소원해진 관계인 건지'를 묻자 "한 전 위원장은 정치 입문 기간은 짧지만 주요 정당의 비대위원장 겸 총괄선대위원장으로 총선을 지휘했기 때문에 정치인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을 했다"며 "앞으로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잘 걸어 나갈 것"이라고 짧게 답했다.
질문의 배경은 김건희 여사 명품 가방 수수 의혹이 확산된 지난 1월로 돌아간다. 당시 한 전 위원장의 '국민 눈높이' 발언과 김경율 전 비대위원의 '마리 앙투아네트' 발언이 윤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케 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실제 한 전 위원장은 이관섭 전 비서실장을 통해 사퇴를 요구 받은 사실을 공개하며 이른바 '윤·한 갈등' 논란이 불거졌다.
결국 한 전 위원장이 충남 서천군 화재현장에서 윤 대통령을 찾아가 몸을 낮춰 사과하는 모습을 연출하면서 사태는 봉합된 듯 보였으나 여파는 컸다. 특히 총선 패배 이후 윤 대통령이 한 전 위원장에게 오찬을 제안했지만, 한 전 위원장이 건강상의 이유로 거절한 뒤 칩거에 돌입하면서 둘의 관계를 둘러싼 해석이 분분했다.
윤 대통령은 '한 전 위원장과의 오찬 불발 이후 따로 연락했거나 다시 만날 계획이 있는지'를 묻자 "20년 넘도록 교분을 맺어왔다. 언제든지 만날 것"이라면서도 "아마 선거 이후 본인도 많이 지치고 재충전이 필요한 것 같아서 부담을 안 주고 기다리는 게 맞지 않나 생각한다"고 했다.
이같은 윤 대통령의 대답은 한 전 위원장과의 관계에 대한 의미를 되짚게 했다. 실제 한 전 위원장은 윤 대통령이 검찰 시절 유독 아끼던 후배로 알려졌다. 인수위 단계에서부터 윤 대통령이 직접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한 뒤, 친윤(친윤석열) 핵심 장제원 의원 등에게 "내가 법무부 장관 하나는 정말 잘 뽑지 않았느냐"고 자랑한 일화도 유명하다.
일각에선 "20년 넘도록 교분"에 굳이 방점을 찍은 것이 한 전 위원장에 대한 윤 대통령의 섭섭한 심경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대목이란 해석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로선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 불능' 상태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영남 지역에서 재선에 성공한 국민의힘 의원은 데일리안과의 통화에서 "정치에선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윤 대통령의 발언으로 볼 때 사실상 한 전 위원장에 대한 선을 우회적으로 그은 것"이라며 "두 사람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수도권 중진 의원도 "대통령이 오찬 초청을 했는데 한 전 위원장이 아파서 거절했다는 게 납득이 되질 않는다"며 "(한 전 위원장의 태도가) 두 사람 관계의 (회복 가능성이 불투명한) 단면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주장했다.
다만 한 전 위원장이 차기 국민의힘 당대표에 출마할 가능성이 거론되는 상황과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당대표 1순위에 더해, 대권 잠룡으로까지 꼽힌다는 점 등에서 여당내 어수선한 기류가 감지된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현재 '한동훈을 막아야 한다'는 쪽과 '한동훈밖에 없다'는 쪽이 반반"이라며 "한 전 위원장이 만약 전당대회에 출마할 경우 사실상 100% 당선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총선 패배에 몰염치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잠재적 권력 구도로 보면 한 전 위원장이 현재로선 우세하다는 게 확실하다"고 귀띔했다.
특히 만약 한 전 위원장이 전당대회에 출마해 당대표로 당선될 경우, 윤 대통령과의 조우는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총선 참패로 임기 내내 여소야대 형국에서 국정을 이끌어야 할 윤 대통령 입장에서 집권여당까지 불편한 관계를 만드는 악수(惡手)를 둘 수는 없어서다.
한 전 위원장의 입장은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한 전 위원장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국민의힘 의원은 통화에서 "정기적으로 (한 전 위원장과) 소통을 하고 있지만, 전당대회 출마나 당내 현안 등에 대한 무거운 이야기는 나누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정치권 일각에선 윤 대통령과 한 전 위원장간 관계 개선 여지가 사실상 불투명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 전 위원장이 윤 대통령과 관계 개선을 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을 것"이라며 "오히려 대통령과 각을 세울수록 본인이 뜬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한 전 위원장을 향해 '정치인으로서 확고히 자리매김을 했다'는 윤 대통령의 발언은 사실상 '너 혼자 잘해보라'는 의미"라며 "권력의 문제에 있어서는 '20년의 교분' 같은 말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관계 회복의 가능성을 일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