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살랑살랑 스치는 바람이 불어오는 봄이다. 서초문인협회에서 철원으로 문학기행을 간다고 알리자 버스 한 대의 인원이 그날로 마감되었다. 유례없이 인기가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DMZ와 접하고 있어 평소에는 가기 힘든 곳인 데다 볼거리도 많아 그런가. 움츠렸던 가슴에 봄기운이 돌자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 때문일까. 햇빛 따사로운 날, 낯익은 문인들과 풍성한 하루를 기대하며 출발하였다.
관광지로는 삼부연폭포가 단연 으뜸이지 싶다. 겸재 정선의 그림 ‘삼부연도’가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스승인 김창흡을 찾아 문안드린 후 폭포를 그린 그림이다. 철원은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조선 시대에는 사대부들이 들렸다 가는 곳이었다. 지금은 당시 그림과 차이가 있다. 폭포의 바위가 떨어져 왼쪽으로 흐르던 물줄기가 오른쪽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삼백 년이라는 세월에 변치 않고 버티기가 어려웠던가. 20미터 높이의 3단 폭포는 수량이 많고 소리도 우렁차다. 무더운 여름에 오더라도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줄기와 바람에 더위가 잊힐 것 같아 보인다.
고석정은 신라 진평왕이 한탄강에 누각을 지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절경이다. 최근에 와서도 ‘선덕여왕’, ‘조선의 총잡이’ 등 드라마 십여 편이 촬영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정자 건너편에는 임꺽정이 은거했다는 자연동굴과 석성(石城)이 남아 있다. 한탄강이 흐르며 만들어진 협곡과 다채로운 바위 절벽에 주상절리를 빚었다. 몇 년 전에 한탄강 순담계곡을 따라 절벽과 허공에 만들어진 3.6킬로의 잔도를 걸어본 적이 있었다. 아찔한 전율도 맛보고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면서 수많은 사진을 촬영하기도 했다. 난간에 만들어진 다리를 걸으면서 중국 초한 시대에 유방이 항우에게 밀려 파 촉으로 가면서 수백 리의 잔도를 불태워 싸울 의사가 없다며 현혹했던 모습이 눈에 훤히 그려진다. 한탄강 위에는 부교를 띄워 물윗길을 만들어 강 위에서 주상절리를 감상하는 것은 또 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으리라.
철원은 우리나라에서 김제평야와 함께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곡창지대다. 반듯하게 경지 정리된 농토에는 물을 채우는 등 농사 준비를 하고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이 유명한 ‘오대쌀’이다. 일제강점기 때 만든 수도국 급수탑과 농산물검사소가 있던 유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철원지역의 농업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궁예가 이곳에 ‘태봉’이라는 나라를 세운 이유도 넓은 평야에서 나오는 먹거리가 풍부한 것이 한 요소가 아니었을까. 김일성도 한국전쟁을 일으켜 이곳을 빼앗긴 것이 원통하여 3일을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광활한 대지에서 생산되는 곡식뿐 아니라, 남북이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일 만큼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지를 오히려 잃게 되었으니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
철원평화전망대에 오르자 4킬로의 비무장지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넓게 펼쳐진 구릉 지대는 키 작은 잡목이 마치 제주도 가파도의 청보리가 봄바람에 물결치는 것처럼 평화롭기만 하다. 이곳에 농사를 짓는다면 굶주림에 허기진 북한 주민들에게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도 있을 텐데. 비무장지대라는 이름 아래 자유도, 노동도 멈춘 채 들판은 넓고 흙은 비옥하지만 만질 수도, 어디에도 발을 디딜 수 없다. 언제 다시 그 흙을 두 손 가득 쥘 수 있을까. 씨 뿌리고 모를 심고, 가을 햇살 아래 황금 들판을 맞이할 수 있을까. 철원 평야는 그런 날이 올 때까지 말없이 기다릴 뿐이다.
DMZ를 내려다보는 순간 탁 트인 개방감과 함께 소름이 돋았다. 248 킬로미터에 이르는 비무장지대 중 무려 43 킬로미터를 감싸 안은 철원은 민족의 상처가 가장 깊게 새겨진 곳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나지막이 보이는 벌거벗은 능선에는 남북이 초소를 설치하고 총부리를 겨눈 채 눈을 부릅뜨고 있다. 높다란 탱크 방벽은 철원 평야를 가로질러 척박하게 서 있다. 대지의 숨결을 끊어놓은 콘크리트 장벽 앞에서 문득, ‘분단’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온몸으로 실감했다. 사람의 왕래를 막기 위해 설치했던 베를린 장벽보다 몇 배는 더 두껍고 튼튼한 탱크 방어벽이다. 베를린 장벽의 한 조각이 전시품이 되었듯이, 이 방벽의 콘크리트 한 덩어리도 박물관에서 옛이야기를 들려줄 날이 조속히 올 수 있기를. 아직은 역사의 한 단락이 아니라, 우리 삶을 지배하는 살아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 가슴 아프다.
방벽 앞 월정리역에는 달리고 싶어 북쪽을 향해 코를 들이민 철마가 멈춰 서 있다. 70년의 세월 앞에 무쇠같이 단단하던 쇠도 삭아버려 뼈대만 앙상한 채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기찻길은 아직도 북녘을 향해 나 있다. 상처의 실핏줄 같은 선로는 두 동강 난 채 고독하다. 한 민족이 흘린 눈물과 한숨이 침전된 길 위에서, 기도의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녹슨 철마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방벽 너머 고향을 그리는 수많은 이들의 눈물이 보였다. 언젠가 이 땅의 장벽 위로 들꽃이 피고, 철마가 다시 북쪽으로 달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꿈꾸어 본다.
철원 문학기행은 단순한 여행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책과 사진으로만 접했던 분단의 현장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고, 우리가 살아가는 땅의 아픈 역사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DMZ의 풍경은 생각보다 더 가까웠고, 더 적막했다. 철원은 아름다운 자연과 볼거리뿐 만이 아니었다. 민족 분단의 현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역사와 현실이 교차하는 현장이었다. 언제쯤 총부리를 마주한 남북의 군인들이 철모를 벗어 던진 채 얼싸안게 될까. 내 살아생전 고요했던 들판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는지.
조남대 작가 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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