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S효성 출범 1년 ①] 조석래 없인 '기술의 효성' 없었다

고수정 기자 (ko0726@dailian.co.kr)

입력 2025.06.30 06:00  수정 2025.06.30 06:00

7월 1일 효성-HS효성 독립경영 1년

효성그룹 '글로벌 기업' 자리매김엔

조석래 명예회장 리더십 결정적 역할

변화 민감하게 읽고 기민하게 대응해

고(故)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 ⓒ효성

오는 7월 1일이면 6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효성그룹이 조현준 회장의 '효성'과 조현상 부회장의 'HS효성', 두 개의 축으로 나뉜지 1년이 된다. 효성가(家) 형제는 '한 가족 두 지붕' 체제 아래 1년간 각자의 청사진으로 외형 성장과 사업 고도화를 도모하며, 독립경영 체제를 연착륙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독립경영 이전, 오늘날 효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데는 고(故) 조석래 명예회장의 '리더십'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데 이견이 없다. 조 명예회장은 1982년, 49세의 나이에 그룹의 2대 회장으로 취임한 후 2017년까지 35년간 효성을 이끌었다. 효성은 한때 재계 10위권까지 올랐다. 그는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해외시장을 적극 개척해 대한민국 경제 성장과 위상 제고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조 명예회장은 시장 변화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읽고, 기민하게 대응한 경영자였다. '효성 40년사'에 따르면, 그는 1970년대 국민소득 수준이 향상되며 생활 습관이 변화하자 일회용품 수요 증가를 예견, 동양나이론 기술연구소 설립(1971년)과 동양나이론 자회사 토프론 출범(1973년)을 통해 페트병을 생산했다. 이러한 선제적 행보는 1974년 동탑산업훈장을 수훈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그는 경영 일선에 있는 동안 '기술 중심주의'를 핵심 가치로 삼았다. '경제발전과 기업의 미래는 원천기술 확보를 위한 개발력이 있다'는 신념 아래 독자기술 개발에 전념해왔다. 이러한 집념은 효성의 '캐시카우'로 불리는 스판덱스와 타이어코드 등의 핵심 사업을 탄생시켰다.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이 2004년 4월 중국 가흥 타이어코드공장을 방문해 관계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효성

특히 효성의 스판덱스 개발은 업계에서 '신화'로 회자될 정도다. 스판덱스는 '섬유의 반도체'로 불릴 만큼 높은 기술 장벽과 고부가가치를 지닌 제품으로 평가된다. 조 명예회장이 1990년 직접 스판덱스 독자 개발을 지시했을 당시만 해도 스판덱스 제조기술은 미국, 일본 등 일부 선진국만이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효성은 조 명예회장의 진두지휘 아래 2년 만에 국내 최초이자 세계 네 번째로 스판덱스 자체 개발에 성공했다. 효성 스판덱스는 2010년 세계시장 점유율 1위 자리에 올라선 후 15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효성은 또한 철을 대체하는 탄소섬유와 고분자 신소재 폴리케톤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하며 기술 혁신을 주도했다. 조 명예회장은 과거 "알짜 사업이라도 세계 1위가 될 수 없다면 포기해야 한다"며 "최고의 이익을 내는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지속 성장하겠다"고 강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효성은 이같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을 적극 공략했다. 조 명예회장이 없었다면 전 세계 50여개 제조·판매 법인과 30여개 무역법인·사무소를 운영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란 게 업계의 정설이다. 조현준 효성 회장은 지난 3월 29일 조 명예회장 1주기 추모식에서 "오늘의 효성은 아버지의 시대의 변화를 읽는 혜안과 강철 같은 도전정신으로 미래를 선점한 결과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재계 대표적 '일본통'으로 중추적인 역할
풍부한 국제 인맥 바탕으로 경제협력 강화 일조
전경련 회장 역임하며 대중소기업 간 상생 도모


조석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 2009년 12월 1일 한국과의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쇼욤 라슬로 헝가리 대통령과 건배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영어와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조 명예회장은 그룹 경영뿐만 아니라 국내 재계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미국, 유럽, 일본, 중국 등과의 경제협력 강화를 위해 '민간 외교관' 역할을 자처했다.


이에 따라 탄생한 별명이 '미스터 글로벌'이다. 조 명예회장은 와세다대 동창인 후쿠다 야스오 전 일본 총리와도 각별한 사이로 알려졌을 만큼 국내 재계의 대표적인 일본통으로 꼽혔다. 풍부한 국제 인맥을 바탕으로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한미재계회의, 한일경제협회,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한중재계회의 등 국제 교류단체를 이끌면서 이런 수식어를 얻게 됐다.


2006년에는 재계 총수로서는 처음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필요성을 공식 제기해 주목 받았다. 한미 FTA 협상 당시 양국의 반대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양국 재계 인사들과 미국 행정부·의회 유력 인사들을 구두 굽이 닳도록 만났다.


조 명예회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협회) 부회장을 1987년부터 20년간 역임한 뒤, 2007년부터 2011년까지는 회장을 맡아 대·중소기업 간 상생 및 일자리 창출에 앞장섰다. 그는 전경련 회장 재임 시절 "물고기가 연못에서 평화롭게 노닐고 있는데 조약돌을 던지면 사라져버린다. 돈도 같은 성격이어서 상황이 불안하면 투자가 일어나지 않는다"며 기업의 투자 환경 개선을 촉구한 바 있다.


물론 그의 삶에는 그림자도 존재했다. 차남 조현문 전 효성 부사장이 촉발한 경영권 분쟁은 '형제의 난'으로 불리며 조 명예회장과 그룹에 적잖은 상처를 남겼다.


그럼에도 조 명예회장은 생전에 작성한 유언을 통해 조현문 전 부사장에게 주요 계열사 주식 등 유류분을 상회하는 재산을 물려줄 뜼을 밝혔다. 특히 "부모 형제의 인연은 천륜"이라며 "형은 형이고 동생은 동생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형제간 우애를 지켜달라"고 세 아들에게 화해도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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