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인들의 안식처, ‘사람냄새’ 나는 극장 동국 [공간을 기억하다]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5.08.08 14:00  수정 2025.08.08 14:00

[다시, 소극장으로㉖] 서울 종로구 극장 동국

문화의 축이 온라인으로 이동하면서 OTT로 영화와 드라마·공연까지 쉽게 접할 수 있고, 전자책 역시 이미 생활의 한 부분이 됐습니다. 디지털화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는 사이 자연스럽게 오프라인 공간은 외면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공간이 갖는 고유한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올해 문화팀은 ‘작은’ 공연장과 영화관·서점을 중심으로 ‘공간의 기억’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극장 동국

┃낡은 문을 열면 시작되는 새로운 이야기, 극장 동국


대학로 혜화동 로터리 인근 대로변. 수많은 건물들 사이에 낡고 좁은 주황색 철문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자칫 그냥 지나치기 쉬운 이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바깥의 소란스러운 세상과는 완벽하게 분리된 새로운 공간이 나타난다. 2014년 문을 연 이래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연극인과 관객들의 땀과 열정이 스며든 ‘극장 동국’이다.


거친 질감의 콘크리트 벽과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갈 때마다 극장 특유의 정적과 설렘이 커지고, 마침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아늑하면서도 어딘가 모를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분위기가 몸을 감싼다.


극장 동국은 영화와 드라마를 활발히 오가며 활약하고 있는 배우 최무성이 대표로 있는 공간이다. 운영은 그가 연출로 있는 극단 신인류의 서신우 대표가 맡고 있다. 서신우 대표 역시 이 곳의 운영자인 동시에 배우다. 서 대표는 이 공간을 “정말 사람 냄새 나는 공간”이라고 말하며, 극장 동국이 가진 독특한 매력을 설명한다. 화려하고 현대적인 시설을 자랑하는 다른 극장들과 달리, 낡고 오래된 느낌 속에서 오히려 깊은 감동을 주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이곳의 핵심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극장 동국은 처음부터 완벽한 모습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서 대표는 과거 극단 활동 시절, 극장 대관이 어렵고 비용이 비싸 고생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배우들이 자유롭게 공연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간절한 꿈이 있었기에, 열악했던 기존 극장을 인수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기존에도 극장으로 활용되던 공간이었는데, 시설이 굉장히 열악했던 극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당시 극단(로가로세) 대표와 이 곳을 인수하고 돈을 조금씩 들이면서 계속 보수해나갔어요. 객석부터 조명기까지 전체를 다 교체했습니다. 솔직히 이 정도 돈을 들일 거면 더 좋은 극장을 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얘기도 했었어요. 하지만 대로변에 위치한 좋은 입지였고, 무엇보다 우리만의 극장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컸기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극장 동국

┃연극의 본질을 탐구하는 '극장 동국'만의 방향성


극장을 운영하는 일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 특히 이윤을 목적으로 한 대관 사업보다는 ‘예술’ 자체에 초점을 맞춘 운영 방식은 재정적인 어려움을 가져왔다. 대관료를 최대한 저렴하게 책정하다 보니 운영비, 특히 매달 나가는 월세 부담이 컸다. 대관 팀이 없어 극장이 비는 달에는 온전히 운영진의 사비로 메꿔야 했다. 서 대표는 그 시간을 “그냥 생짜로 버텼다”고 회상한다.


가장 큰 위기는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 공연이 중단되고 극장이 문을 닫으면서 운영은 벼랑 끝에 몰렸다. 하지만 극장 동국은 단순한 공연장이 아닌, 예술가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길 바라는 진심을 담아 이 공간을 지켜왔다. 배우들이 직접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도 이 공간의 진정성과 맞닿아 있다.


“원래는 배우로서 제 삶만 신경 쓰고 싶었기에 극단 대표를 맡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즐겁게 연기하는 단원들을 보면서, 이들에게 좋은 작품과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책임져야 할 부분이 많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단원들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돼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힘들더라도 이렇게 함께하는 게 옳다고 믿었습니다.”


ⓒ극장 동국

그덕에 극장 동국은 상업적인 성공보다는 예술적 가치를 추구하는 공간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다. 극장은 이러한 정체성을 담아 매년 다채로운 행사를 주최한다. 상반기에는 40대 이상 베테랑 배우들을 위한 축제인 ‘무죽(무대에서 죽을란다) 페스티벌’을, 하반기에는 젊은 연출가들의 창의적인 시도를 응원하는 ‘연출가전’을 연다.


“예전에 50대가 된 한 선배님이 연기를 참 잘하시는데도 설 자리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젊은 배우들이 선배들의 연기를 더 많이 봐야 한다는 생각에 이 축제를 시작하게 됐죠. 이처럼 극장 동국은 배우나 연출가, 제작진 등 예술 창작진들에게 힘이 닿는 데까지 최대한 힘이 되어주고 싶다는 방향성을 가지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운영 철학은 대관팀을 선정하는 기준에도 반영된다. 장기간 상업극을 올리기보다는 2주에서 한 달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다양한 예술 작품을 올리는 극단에 대관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하고자 노력한다. 이는 극장 동국이 연극이라는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고, 다양한 창작자들에게 실험의 장을 제공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극장 동국이 그리는 최종 목표는 거창하지 않다. 그저 현재 진행 중인 페스티벌을 멈추지 않고 20회, 30회까지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다.


“우리 극장은 단순히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 아닙니다. 예술 작품을 하는 창작진에게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목표입니다. 동국이 계속해서 예술가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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