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광복 8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일제강점기 암흑의 시대에 많은 우리 선조들이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 중에는 생명을 살리는 의술을 펼치던 한의사들도 적지 않았다. 독립운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세 분의 한의사를 소개한다.
강우규(1855~1920)는 함경남도 출신 한의사다. 65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향해 폭탄을 던진 의열투사다. 을사늑약 체결 후 만주로 망명한 강우규는 북간도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며,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했다.
1915년 요동의 라오허현으로 이주해 농토를 개간해 신흥촌이라는 한인촌을 건설했다. 이곳은 후에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가 됐다. 1917년에는 광동중학교를 세워 동포 교육에 힘쓰며,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강우규의 의거는 3.1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투쟁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큰 경고가 됐으며, 국내외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크게 고취시켰다.
1897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박성수는 조선무약 창립자다. 우리에게 친숙한 ‘솔표 우황청심원’을 개발한 인물이다. 당대 한의학의 명가인 이상열 문하에서 한의학을 수학한 후 1919년 경성한약전수학원을 졸업했다.
1920년 23세 나이에 ‘질병으로부터 국민을 지킨다’는 일념으로 한성약업사와 대창창업사를 창설했다. 하지만 독립운동에 가담한 이유로 그해 9월 수감돼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5년 조선무약합자회사를 설립한 박성수는 솔표 우황청심원을 개발했다. ‘솔표’라는 상호는 그의 아호인 일송(一松)에서 따온 것이다. 지조와 의리, 불로장생의 상징인 소나무처럼 어려운 난국에서도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의 건강장수를 이루겠다는 염원이 담겨 있다.
자생한방병원 설립자 신준식 박사의 선친인 신광렬(1903~1980)은 의사이면서 한의사이자 독립운동가로, 2022년 독립유공자로 서훈됐다.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난 신광렬은 1930년 간도 용정에서 3·1운동 11주년 기념 항일시위운동에 참여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당시 일본총영사관 기병대 경찰이 휘두른 군도에 맞아 옆구리에 30cm가 넘는 자상을 입었다. 석방 후에는 서간도에서 의사 시험에 합격하여 광생의원을 운영했다. 동시에 독립군의 군수품을 전달하는 등 항일투쟁을 지원했다. 해방 후 남한으로 내려와 한의학 재건에 힘써 청파한의원을 개원했다. 집안의 비방을 모아 ‘청파험방요결’을 집필했다. 이는 훗날 아들 신준식 박사가 비수술 척추 치료법을 개발하는 토대가 됐다.
일제강점기 많은 한의사들이 의병전쟁과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국내외 한약방들이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활용됐다. 이들의 행적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한의사라는 직업을 통해 사람을 모으고 독립운동의 연락본부 및 자금조달 역할에 주력했다. 이는 의료인의 사회적 책임의식과 직업 윤리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안락한 삶을 버리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의료인들의 모습은 현재의 의료진들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안녕을 우선시하는 정신, 전문성을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자세가 바로 그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의 고결한 정신과 바른 정의는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이타심이 작아지는 지금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억돼야 할 가치다.
특히 한의사 독립운동가들의 재조명은 그간 상대적으로 소외돼왔던 분들을 재조명함으로써 독립운동사의 스펙트럼을 넓힌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무장투쟁이나 정치 활동 외에도 의료, 교육,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뤄진 독립운동의 가치를 합당하게 평가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광복 80주년을 맞는 오늘, 생명을 살리는 의술을 펼치면서도 조국 광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이들의 숭고한 뜻을 되새겨본다.
글/ 이한별 한의사·구로디지털단지 고은경희한의원 대표원장(lhb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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