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억원(왼쪽 다섯번째) 금융위원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지난 10월 1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새도약기금 출범식에서 현판 제막을 하고 있다. ⓒ뉴시스
이재명 정부가 내놓은 새도약기금과 새도약론은 표면적으로는 ‘연체자의 재기 지원’이라는 목표를 내세우고 있다. 장기 연체자를 구조조정하고, 기존 채무조정 이행자에게 생활·사업 자금을 보태 재기를 돕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정책 방향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그 방식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설계가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채 속도만 앞서고 있다는 점이다. 정책의 의도가 아무리 선해도, 신용질서와 금융시장에 미치는 간접효과까지 고려되지 않으면 오히려 시장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
새도약기금은 7년 이상 장기 연체자를 대상으로 연체 채권을 통으로 매입한다. 여기에는 도박·투자 채무가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이미 제기됐다.
새도약론은 채무조정 이행자에게 연 3% 금리로 최대 1500만원을 대출해주는 구조인데, 동일하게 도덕적 해이를 걸러낼 별도 장치는 없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적 해이는 ‘윤리의 문제’라기보다 신용사회의 인센티브 구조를 흔드는 문제다. “연체를 해도 결국 정부가 개입해 정리해준다”는 신호가 시장에 쌓일 경우, 성실 상환자와의 형평성은 물론 금융시장의 위험 가격체계도 왜곡될 수 있다.
사실 정부의 배드뱅크 정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름만 다르게 반복돼왔다. 문제는 재정 투입 규모만 커질 뿐, 정책의 산출과 효과가 어떻게 검증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매번 부족했다는 점이다.
새도약기금·새도약론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는 더 많은 재원을 투입해 더 많은 연체자를 구제하겠다고 하지만, 정작 ▲채권 매입 예상 규모 ▲실제 수혜 대상자 수 ▲정책 효과의 근거 모델은 공개되지 않았다. 이는 재정 투입 정책의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비워둔 셈이다.
과거 사례 역시 이런 우려를 뒷받침한다. 장기소액연체자지원재단의 양혁성 이사장 사례처럼, 정책이 본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면 운영비만 소모하고 사실상 실패로 끝나는 경우도 있었다.
정책이 충분한 검증 없이 시작됐다가 정권 말에 의미 없이 남겨지는 문제가 반복돼선 안 된다.
한 정부 관계자는 “예전에는 신용회복위원회의 개인워크아웃 제도가 미비했기 때문에 정부 차원의 배드뱅크 정책이 효과적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대출이 한 달만 연체돼도 신용등급이 즉시 하락하는 구조여서 장기 연체로 방치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장기소액연체재단도 매입할 채권이 없어 잉여금이 남았고, 이번 새도약기금 역시 대부업권이 참여를 꺼리는 상황에서 정책 효과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금융시장은 결국 ‘신뢰’ 위에서 작동한다. 채무조정 정책은 사회적 재기라는 긍정적 목표를 지니는 만큼, 그만큼 정교한 설계와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성실 상환자에게 상대적 불이익이 돌아가고, 시장이 “연체를 해도 괜찮다”는 신호를 받는 순간 이 정책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신용질서 자체를 흔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정부가 말하는 ‘새로운 도약’은 특정 집단만을 위한 문이 되어선 안 된다. 재정이 투입되는 정책일수록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정합성과 공정성이 필요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시장이 신뢰할 수 있는 정교한 설계와 균형 잡힌 접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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