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공간 재탄생’의 시대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의 공세와 관객수 감소라는 이중고에 직면한 영화관이 생존을 위해 과감히 스크린을 내리고 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영화가 아닌 연극과 뮤지컬 등 ‘공연’ 콘텐츠다. 이는 단순히 일부 상영관을 다른 용도로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 공간의 정체성 자체를 바꾸는 구조적 변화다.
충무로 한국 영화사의 상징과도 같던 대한극장의 변신은 이러한 흐름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다. 지난 66년간 한국 영화의 흥망성쇠를 함께했던 대한극장은 10년이 넘는 적자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폐관을 결정했다. 영화 팬들의 아쉬움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던 이곳은 놀라운 변신을 통해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건물 전체를 세계적인 이머시브 공연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의 전용관으로 개조하며 완전히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슬립 노 모어’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연으로, 관객이 가면을 쓴 채 호텔을 연상시키는 다층의 공간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배우들의 연기를 바로 눈앞에서 관람하는 독특한 형식이다. 정해진 좌석 없이 관객이 스스로 이야기를 따라가는 이 공연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대한극장은 기존 상영관의 구조를 허물고 100개가 넘는 방과 복도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연장으로 탈바꿈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개관 이후 연일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으며, 공연 시작 전에는 입장을 기다리는 관객들로 공연장 입구엔 긴 줄이 늘어서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각종 소셜미디어와 유튜브에는 공연의 경험을 공유하는 후기 영상이 쏟아지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한때 적막감이 감돌던 극장 앞은 이제 새로운 문화 체험을 갈망하는 이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이는 영화관이라는 단일 목적의 공간이 어떻게 관객의 변화된 수요에 맞춰 성공적으로 진화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대한극장의 성공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다. 주요 멀티플렉스 역시 상영관을 공연장으로 전환하며 공간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롯데시네마는 대표 지점인 월드타워점의 일부 상영관을 약 350석 규모의 중극장 공연장으로 전환할 계획을 공식화했다. 이는 국내 대표 멀티플렉스가 상영관을 없애고 그 자리에 본격적인 연극, 뮤지컬 공연장을 만드는 첫 사례다. 가장 중요한 자산인 ‘공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인지 고민한 결과다. 영화 상영만으로는 더 이상 높은 임대료와 고정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연중 꾸준한 관객 동원이 가능한 공연을 유치해 새로운 수익 모델을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CGV 또한 공간을 활용한 다각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특히 CGV피카디리1958은 한국 영화의 역사를 담은 전시 공간 ‘명예의 전당’을 운영하는 등 극장을 영화 관람 이상의 경험을 제공하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꾸준히 발전시켜 왔다. 비록 직접적인 공연장 전환은 아니지만, 클라이밍짐 ‘피커스’를 입점시키는 등 상영관과 유휴 공간의 용도를 과감하게 바꾸는 시도를 통해 공간 활용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이러한 영화관과 공연계의 만남은 서로의 필요가 정확히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했다. 영화관은 관객 감소로 비어가는 공간을 채우고 새로운 집객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반면 공연계는 늘 부족했던 공연장, 특히 중소극장 규모의 설비를 갖춘 공간을 확보하며 콘텐츠 제작의 폭을 넓힐 수 있게 된 셈이다.
상영관의 물리적 구조를 바꾸는 것과 더불어, 콘텐츠의 다양화를 통한 활로 모색도 활발하다. 영화관의 대형 스크린과 풍부한 사운드 시스템을 활용한 연극·뮤지컬 실황 상영이 대표적이다. 이는 공연장에 직접 가기 어려운 관객들에게 새로운 관람 기회를 제공하고, 영화관에는 고정 팬층이 확실한 콘텐츠를 확보하는 ‘윈윈’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실제로 올해 하반기에는 대형 창작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공연 실황을 담은 ‘프랑켄슈타인: 더 뮤지컬 라이브’가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이 외에도 다양한 케이팝 아티스트의 콘서트 실황이 꾸준히 영화관에서 상영되며 높은 객석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영화관은 이제 영화뿐만 아니라 뮤지컬, 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 콘텐츠를 즐기는 ‘N차 관람’의 중심지로 변모하고 있다.
한 공연 관계자는 “영화관의 변신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라며 “공연 시장의 호황과 영화 시장의 침체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면서 영화관을 공연장으로 탈바꿈시키는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장르는 다르지만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서 공간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하면서 관객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있다면 오히려 ‘위기’는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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