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가위 연휴는 역대급으로 길었다. 마침 추석을 앞두고 늦더위가 물러가며 서늘한 바람이 불었고 연휴 기간 내내 가을비가 내려 완연한 가을의 정취가 물씬 묻어났다.
여름의 열기가 빠져나가고 대지가 숨을 고르는 이 시점은 한의학적으로도 중요한 전환기다. 인체의 기운이 겉에서 안으로 수렴하면서 음양의 균형이 바뀌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때는 비위와 폐의 기능을 잘 돌보는 것이 면역과 회복의 핵심이 된다.
추석 상차림에 오르는 재료 중에는 단순한 식재료를 넘어 ‘약재’로 활용되는 귀한 것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대추, 율무, 토란, 그리고 밤은 모두 오랜 세월 동안 한의학에서 계절과 인체를 잇는 보약으로 평가돼 왔다.
대추(大棗)는 동의보감에서 “비위를 보하고 오장을 안정시킨다”고 기록돼 있다. 달고 따뜻한 성질이 위장을 보호하고 피로로 인한 신경 불안을 완화한다.
현대 연구에서도 대추에 함유된 폴리사카라이드와 플라보노이드가 면역세포를 활성화하고 항산화 작용을 돕는다는 결과가 보고됐다. 특히 장내 미생물 균형을 개선하고 스트레스성 위염을 완화하는 효과가 주목받고 있다.
율무(薏苡仁)는 여름의 잔습을 몰아내는 약재로, 한의학에서는 “습열을 제거하고 비장을 튼튼히 하며 피부를 윤택하게 한다”고 한다. 체내 수분 대사가 원활하지 않아 부종이 잘 생기는 사람이나 무겁고 나른한 피로감이 지속될 때 율무차나 율무죽이 좋다.
현대의학에서도 율무에 함유된 코익소익산(coixenolide) 성분이 항염·항암 작용을 나타내며, 혈당 조절 및 피부 트러블 개선에 도움을 준다는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토란(芋)은 가을 뿌리식물로, 비위를 보하고 열을 내리는 효능이 있다. 부드럽고 점액질이 풍부해 위장에 부담이 적고 칼륨 함량이 높아 체내 나트륨 배출을 도와 혈압 조절에 유익하다. ‘본초강목’에서는 “비위를 조화시키고 종기를 삭인다”고 기록돼 있으며, 현대 연구에서는 항산화 및 간세포 보호 효과가 보고되고 있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밤(栗)이다. 밤은 예로부터 ‘서민의 인삼’이라 불릴 만큼 영양이 풍부하다. 명의별록에서는 “기혈을 보하고 허약을 보완하며 위를 따뜻하게 한다”고 했으며, 동의수세보원에서는 태음인의 소화문제에 자주 사용되는 처방인 ‘태음조위탕’에 밤이 약재로써 사용된다.
밤에는 비타민 C와 타닌, 루틴이 풍부하여 모세혈관을 강화하고 혈액순환을 돕는다. 현대 연구에서는 밤 추출물이 항산화 작용과 간 기능 개선, 혈당 안정 효과를 보인다는 결과가 발표되었다.
대추의 보혈, 율무의 이수, 토란의 비위보강, 밤의 기혈보익 이 네 가지는 모두 인체의 ‘비위 중심축’을 강화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추석 이후 폭식과 피로로 인한 소화불량, 부종, 피로감이 찾아올 때 이들 식재료를 활용하면 계절에 맞는 자연스러운 회복이 가능하다.
명절 음식이 단순한 풍습이 아닌 계절의 기운을 보충하고 몸을 조화시키는 한의학적 식치(食治)의 지혜였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풍요로운 한가위 뒤 수확의 계절을 맞이하는 지금이야말로 인체의 음양을 정돈하고 기와 혈의 균형을 회복해야 할 때다. 보름달처럼 원만하고 밝은 기운이 몸속에도 차오르기를 바란다.
글/ 이한별 한의사·구로디지털단지 고은경희한의원 대표원장(lhb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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