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채 오기도 전에 삭풍이 분다
지연된 정의가 되고 만 선거법 재판
정치권력은 손아귀에 움켜쥔 모래
이재명 대통령이 14일 국무회의에서 한 말이다. 대통령은 재판관이 아니다. ‘되지도 않는 이유’로 규정할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이 아니면서 그렇게 단정하는 것이 의아하다. ‘진실을 말해야 할 사람들이’라고 말했는데 그 ‘진실’이 무엇이며, 무슨 근거로 국회 증인들의 말을 ‘뻔뻔한 거짓말’로 매도하는지도 알 수 없다.
지난 1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대법원 국정감사에서 조희대 대법원장을 조리돌림 하듯 했으나 그의 입을 열게 하지는 못했던 데 대한 불쾌감의 표출인 것 같은데, 물론 짐작일 뿐이다. 내란재판부를 설치하고 대법원을 개편하는 등 이른바 사법 개혁을 통해 권력의 새 질서를 조속히 세우고 싶다는 성급함이 읽히기도 한다. 차제에 정부, 여당, 그리고 수사기관들의 기강을 다잡아야겠다고 판단했다는 뜻일까?
겨울이 채 오기도 전에 삭풍이 분다
이 대통령은 그러면서 이진수 법무부 차관에게 “언제 고발이 됐고, 어떻게 수사 중이며, 어떤 처분이 내려졌는지 점검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산천초목이 떨만한 대통령의 엄명이다. 아무래도 사법부 쪽에는 겨울이 채 오기도 전에 삭풍(朔風)이 들이칠 모양이다.
이 대통령의 구상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검찰·경찰더러 왜 제대로 수사하지 않느냐고 신칙하는 장면은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다. 작년까지만 해도 ‘정치보복’ ‘야당탄압’ 등 자신이 선창했던, ‘전 정부와 검찰 성토’의 구호들을 깡그리 잊어버린 건가? 더욱이 검찰은 내년 10월부터는 사라질 기관이다. 수사권을 남용한다는 게 검찰청 폐지의 핵심 이유 아니던가? 그 검찰더러 왜 미적거리느냐고 호통이라니!
사실 이 대통령은 수사와 재판에 관한 한 누구보다 말을 아껴야 할 입장이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 5개 재판의 피고인 신분이었다. 그중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는 대법원에서까지 유죄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이 났었다. 대법원이 ‘유죄’를 인정하고 원심법원(서울고등법원)의 형량 결정만 남은 상태였다. 범법자로서 대통령이 된 것이다.
지난 6월 3일 그가 선거에서 승리하자 9일 서울고법은 그달 18일로 예고됐던 공판에 대해 ‘추후지정’ 결정을 내렸다. 대통령 임기 중에는 재판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영구적 면죄 방안이 다각적으로 강구되고 있기도 하다). 그걸 신호로 다른 4개 재판부도 줄줄이 추후지정으로 이 대통령 사건에 대한 재임 중 공판을 포기해 버렸다.
헌법 84조의 대통령 ‘불소추 특권’을 근거로 삼았는데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는 내용이다. 재임 중에 저지를 수 있는 범법 행위에 대한 사법적 면책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법률지식이 대단한 법률가들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민초의 상식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집권 세력은 검사의 기소만이 아니라 재판도 ‘소추’에 포함된다고 우긴다.
지연된 정의가 되고 만 선거법 재판
일개 시정인의 생각일 뿐이지만 형사적 문제를 가진 사람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헌법에서조차 범죄혐의를 가지고 대통령이 되는 경우를 대비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누가 유죄 판결받을 정도의 법적 하자를 가진 사람이 선거에 나서서 대통령이 되고, 그 힘으로 자기 재판을 회피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게다가 선거법 위반 및 위증교사 사건 재판에 1심 2년 2개월, 2심 5개월이 걸렸다. 양심이 있으면 생각해보고 답하라. 이게 정상적 재판인가? 대법원이 왜 선거에 임박해서 판결했느냐고 따지는데 1심 6개월, 2, 3심 각 3개월 안에 선고가 나야 한다고 법이 정한 기간을 그렇게 넘겼는데도 대법원이 또 늑장을 부려야 했다는 건가? 왜 당시의 이 후보에게만은 특혜가 주어져야 했다고 여기는가?
천대엽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13일 국정감사에서 그렇게 말했다. 대법이 이례적으로 빠른 판결을 통해 대선에 개입했다는 민주당 의원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었다. 이 같은 대법의 사명감에도 불구하고 서울고법이 ‘공판 추후지정’을 결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지연된 정의’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한없는 특혜를 받은 이 대통령이 이젠 오히려 사법부를 향해 책임추궁을 하는 형국이 됐다.
이 대통령이 ‘권력의 서열’을 주장할 때부터 그 의도와 계산은 짐작할만했다. 대통령 휘하에 3권을 아우르겠다고 생각했거나, 이미 아울러진 것으로 판단했다고 보는 게 아마 정답일 것이다. 정권을 잡기 무섭게 생전 듣느니 처음인 ‘신 권력론’을 내세우며 3권을 자기 앞에 줄 세우려 하다니! 원래 3권은 서로 대등한 국가 권력의 세 축으로 설계됐다. 민주정치가 독재정치·전제정치로 퇴화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로서 몽테스키외 등이 제시한 구상이었다.
정치권력은 손아귀에 움켜쥔 모래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국민의 선거로 뽑히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민주적 정당성이 확보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전 국민의 선거로, 국회의원은 선거구별 선거를 통해 그 지위 직책을 부여받았다. 대한민국의 헌법으로부터! 사법부의 경우는 전문성이 요구되는 사람들로 구성돼야 하는 조직이다. 그래서 자격이 검증된 사람들로서 채워지는 것이다. 헌법은 3권 간의 우열을 정하지 않았다. 만약 이 대통령의 논리대로 서열이 있다면, 민주정치는 그 순간 와해되고 만다. 국가 권력이 대통령으로 일원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인식되어야 할 건 또 있다. 입법부는 법을 만드는 권한, 행정부는 법을 집행하는 권한, 사법부는 법을 해석하는 권한을 갖는다. 이 경계를 넘어서 버릴 경우 민주주의는 심대한 위기에 빠진다. “대통령도 갈아치우는데 대법원장이 뭐라고”라는 정청래 유(類)의 의식은 헌법 질서에 대한 무지와 불경이다.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재판’을 잘못했다고 해서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에 대한 청문회를 두 번이나 강행한 추미애 법사위원장의 경우는 입법권을 빙자한 헌법농락, 정치 행패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는 법사위 국감을 종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날 국감에서 조 대법원장이 여당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것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은데 마치 자신과 법사위(그중 민주당 소속 의원들)가 국민주권의 전적인 수권기관이나 되는 양하는 말로 들린다. 나라의 주권은 이 대통령의 말처럼 국민의 것이다. 그 주권은 헌법으로 표현된다. 헌법상 입법·행정·사법부 사이에 서열 따위는 없다. 왜 주권을 자기들이 독점한 것처럼 말하고 행세하는지 황당하다.
말이 났으니 말인데 이 대통령이 말하는 ‘국민주권 정부’라는 것은 자칫 ‘민중주권 정부’ 또는 ‘인민주권 정부’로 변질될 위험성이 농후한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권력을 쥐었으니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으스대다 보면 어느 순간에 다 잃어버린 자신을 마주할 수도 있다. 권력은 손아귀에 쥔 모래알 같은 것임을 왜 생각하지 않는지 어이없고 한심하다. 움켜쥘수록 더 빨리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는 게 권력이다. 한 개인은 물론 국가에도 가장 큰 불행을 안기는 것이 권력 독점 욕구임을, 역사의 경험칙으로서 기억하시라.
글/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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