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사상가로서 이건희 회장을 다시 생각한다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5.10.24 10:00  수정 2025.10.24 10:00

인간 이건희는 단순히 재벌 회장이라기보다 경영사상가

항상 본질을 묻고 끝까지 해답을 찾는 5WHY 질문을 활용

기업문제 외에 각종 국가 인프라에 대한 해답도 제시한 경영자

2025년 10월 24일 삼성그룹 로그인 화면.ⓒ 제공 삼성

10월 25일은 이건희(李健熙·1942~2020) 삼성그룹 선대회장이 별세한지 5주년 되는 날이다. 삼성그룹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만든 재벌 회장이 세상을 떠나서가 아니라, 시대를 앞서고 리드하던 경영사상가를 잃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더 크다.


‘KH’라는 이니셜로 불리는 이건희 회장을 경영사상가로 보는 이유는 첫째 기업의 성격에 대한 역발상(逆發想) 이해, 둘째 인간과 비즈니스의 본성에 대한 입체적 시각, 셋째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며칠 밤을 새우더라도 집요하고 골똘하게 파고드는 능력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늘 근본을 묻고 본질을 추구했다. 거의 모든 대화에서 ‘5-Why 기법’을 통해 뿌리를 찾는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왜? 그래서 왜? 그렇지만 왜?”라며 계속 파고든다. 남들이 ‘영업’이나 ‘생산’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 그는 ‘구매’부터 강조하고 예술화해야 한다고 했다. 협력업체와 파트너십을 통해 양질의 부품을 저렴하고 신속하게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으로 중요함을 강조했다.


오랫동안 이건희 회장의 통역을 맡았던 황영기 전(前) 삼성증권 사장은 “이건희 회장은 그저 탁월한 기업인이 아니라, 늘 삼성을 통해 국가와 사회를 업그레이드하려고 했던 경세가(經世家)란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로저 마틴 토론토대 교수도 “경영의 핵심은 상상(Imagination)인데, 이건희 회장은 상상력이 풍부했던 ‘전략이론가’이자 ‘통합적 사상가’였다”고 평했다.


이건희 회장은 1987년 회장 취임 이후 입만 열면 ‘인프라’를 외쳤다. 선진국에 뒤져 있는 도로율, 항만시설, 전력사정 등의 구체적인 수치를 들며 개선책을 제시했다. 나라 전체가 변하고 발전하지 않으면 삼성도 부강해질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가령 삼성병원의 실용적 장례문화 변화가 한국 병원 전체에 참신한 바람을 불어 넣은 것이 대표적 사례다. 김포공항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영종도에다 공항을 짓고 관련 인프라를 세우는 데 대한 언급도 그는 매우 구체적으로 했다. 삼풍백화점 사태가 나자 삼성은 '3119'라는 구조대를 만들어 국가적 사고 예방에 기여하기도 했다.


1989년부터 삼성이 전국에 어린이집을 설치할 때다. 이 회장은 “서울에 구(區)마다 동(洞)마다 탁아소 부지를 확보하라”고 지시하며 “이것이 국가 인프라”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탁아소 한다고 하니 ‘삼성이 부동산 투기한다’고 모두 반대했다. 그런데 탁아소 원리를 아는가? 달동네가 있는 한 그 나라, 특히 서울이 안정된 경제활동을 할 수 없다. 그런데 삼성이 만든 탁아소에 아이들을 맡기고 부부가 한 3년에서 5년 열심히 일하면 집 한 채가 생긴다. 이것이 확 퍼지면 달동네 전체가 열심히 일한다. 그저 삼성의 이미지 개선이 목표였다면 왜 달동네에다 탁아소를 만들겠는가”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피력했다.


이건희 회장은 1993년 6월 신경영을 선언하면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메가(Mega) 메시지를 필두로 “양(量)을 버리고 질(質)로 간다”는 혁신적 경영방침을 곁들인 뒤 “7시에 출근하고 4시에 퇴근하라”며 파격적 근무제를 도입했다. 불량률이 10%가 넘던 무선전화기(휴대전화와는 다름) 15만대를 구미공장에서 불태우고, 생산라인에 문제가 생기면 즉각 멈추는 라인스톱제를 도입했다. 1995년 공채부터는 학력 제한도 없앴다.

필자는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직접 신경영 관련 이야기를 들었다. “회사 디자인 책임자에 적합한 한국인이 없었어. 그래서 시카고에서 공부했던 일본인 후쿠다를 알게 되었지. 말은 안 통해도 디자인 용어는 서로 아니까 지휘하라고 했어. 그런데 도쿄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가는데 일기장을 보여 주더라. 읽어보니 결론은 ‘도저히 못 하겠다. 엉망이다. 조언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회장인 내 말도 안 먹히는데 당신 말이 먹히겠느냐고 생각했다. ‘부품을 제자리에 안 갖다 놓고, 위에서는 느닷없이 디자인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른다’라는 내용도 있었다. 독일 호텔에 도착한 뒤에는 공장에서 세탁기 뚜껑을 칼로 깎는 비디오까지 보았다. 회사가 썩을 대로 썩었다. 공장에 나사가 굴려 다녀도 줍는 사람이 없는 회사가 삼성전자다. 3만명은 만들고 6000명은 고치러 다니는 비효율 회사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삼성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데일리안 DB

지금 반도체는 AI(인공지능)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반도체가 수요보다 공급이 턱없이 모자라는 슈퍼사이클 시대를 맞았다. 그 배경에는 이건희 회장의 결단이 컸다. 그는 1974년 한국반도체라는 회사를 사비까지 들여 인수하면서 대다수가 반대하던 반도체 산업에 진출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시대 조류가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넘어가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지. 또 반도체는 우리 민족의 재주와 특성에 딱 들어맞는 업종이야. 우리는 ‘젓가락 문화권’이라 손재주가 좋고, 주거생활 자체가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등 청결을 중시한다. 이런 문화는 먼지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되는 반도체 생산에 아주 적합하지.”


이건희 회장은 1988년 반도체를 제조할 때 지하로 파고들어 가는 트렌치(Trench) 공법보다는 회로를 고층으로 쌓는 스택(Stack) 공법을 결정했다. 이 회장은 “나는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해 보려고 한다”면서 “지하를 파는 것보다 위로 쌓아 올리는 것이 더 수월하고 문제가 생겨도 쉽게 고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고 강조했다. 실제 트렌치 공법을 적용한 일본 NEC와 도시바 등은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삼성전자는 성공을 이어 나갔다.


이 회장은 초기에 일본 기술을 들여오기 위해 거의 매주 일본으로 가서 반도체 기술자들을 만났다. 그는 “일본 기술자를 몰래 토요일에 데려와서 우리 기술자들에게 밤새워 기술을 가르치게 하고 일요일에 보낸 적도 많았다”라고 설명했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 ⓒ 데일리안 DB

실패에 대한 그의 철학은 무엇이었을까. “신약이나 신물질을 개발하려면 평균 1만 2000번의 실패를 거쳐야 하고 석유탐사도 최소 25번은 실패해야 비로소 하나의 유정(油井)을 발견한다. 실패는 병가상사(兵家常事)인데도 실패 자체가 두려워 오그라진 사람이 많다. 나는 작은 성공의 누적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작은 성공으로 자만심에 빠져 더 큰 실패를 가져오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세간에서는 삼성이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넌다고 하지만, 나는 임직원들에게 돌다리는커녕 나무다리라도 있으면 건너가라고 한다. 위험을 각오하고 선두에서 달려가야 기회를 선점한다.”


이건희 회장은 결국 경영이란 사람의 문제로 보았다. 영화광이기도 한 그는 “영화를 볼 때 보통 주인공에게 치중해서 본다. 하지만 스스로를 조연이라 생각하고 보면 아주 색다른 느낌을 받는다. 거기에 감독, 카메라맨의 자리까지 두루 생각하며 보면 또 다른 감동이 있다. 입체적인 사고 능력을 키우는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그런 이해에서 그는 남의 발목을 잡는 사람을 가장 싫어했다.


이 회장은 창조적 천재에도 주목했다. 그는 “바둑 1급짜리 10명이 머리를 싸매고 함께 달려들어도 바둑 1단을 이기기 힘들듯이, 미래는 뇌력사회(腦力社會)로 한 사람의 비범한 천재가 수만 명을 부양하는 시대가 된다”면서 “그런데 우리나라는 영재에 대한 무관심, 입시 위주의 암기식 교육으로 잠재력 있는 인재마저도 2류로 만들어 버린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1995년 북경(北京)에서 특파원들과 만나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했던 발언 때문에 김영삼 정권으로부터 곤욕을 치르기도 했던 이건희 회장은 “내 발언의 취지는 덮어둔 채, 마치 정부를 비판하고 정치권을 매도하는 내용으로 알려지면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고, 손을 들어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보는 현실에 실망도 많이 했다”고 밝혔다. “규제혁파를 하려면 정치에 직접 참여해보라”라고 주위에서 권유하면, 이 회장은 그때마다 “나는 하루종일 집에서 파자마를 입고 있는 것이 편하다”는 농담으로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5년 전 이건희 회장 별세 당시 언론보도를 분석하면서 부정적인 뉴스가 3.2%뿐이고 모두 낯 뜨거운 두둔과 찬양 일색이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는 인간 이건희가 남긴 임팩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다. 단순히 막강한 광고·협찬 파워를 가진 삼성그룹의 최고경영자여서 모든 언론이 그렇게 칭찬했을까. 거기에는 이건희 회장이 지닌 독특한 경영사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예외 없이 실수를 저지르고 실패한다. 이건희 회장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긍정적 성과와 영향력은 실수와 실패의 수십 배, 수백 배가 된다. 이건희 회장을 경영사상가로 깊이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글/ 최홍섭 칼럼니스트

0

0

기사 공유

댓글 쓰기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관련기사

댓글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