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선언 채택 성공하며 의장국 존재감 발휘…
한미 관세합의·한중 호혜협력·한일 셔틀외교
성과 속 李대통령 외교 진짜 균형의 시험대로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의장인 이재명 대통령이 1일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에서 열린 제2세션을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20년 만에 한국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1일 경주에서 막을 내렸다. 의장국 정상인 이재명 대통령은 미국·중국·일본 정상을 모두 경주로 모이게 하며 외교 무대를 주도했지만, 성과와 과제는 동시에 남았다. 한미 관세협상 타결과 한중 관계 복원, 한일 셔틀외교 재개로 외교 3축에서 성과를 냈으나 대규모 대미 투자 부담, 미중 갈등 속 균형, 동북아 협력의 지속 관리가 과제로 자리하고 있다.
2일 정치권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이번 APEC 정상회의를 통해 통상·외교·경제 분야에서 모두 가시적 장면을 만들어 냈다. 다만 외교 무대에서 도출된 내용들이 실제로 이행되고, 미중 간 패권 경쟁 속에서 한국이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면서 성과를 장기적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가 관건으로 지목된다.
이번 정상회의에서는 공동선언문인 '경주 선언'이 채택됐다. 경주 선언은 APEC의 3대 중점과제인 '연결(Connect)·혁신(Innovate)·번영(Prosper)'을 기본 틀로, 무역·투자, 디지털·혁신, 포용적 성장 등 핵심 현안에 대한 주요 논의를 포괄했다. 또한 인공지능(AI) 협력 및 인구구조 변화 대응에 대한 회원들의 공동 인식과 협력 의지를 집약했다.
공동선언문에서는 WTO(세계무역기구)와 다자무역체제를 지지한다는 직접적 표현은 제외됐다. 미국이 자국 중심의 보호무역 기조를 강화하며 글로벌 무역시스템의 근간인 WTO 관련 문안을 APEC 성명에서 제외하는 것을 원했고, 중국은 다자주의를 강조하는 한편 미국을 염두에 둔 일방주의와 보호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절충이 쉽지 않았던 상황이다. 그럼에도 모든 정상들의 만장일치를 통해 경주선언이 채택됐다.
대통령실은 "정상회의 당일까지 문안 타결을 위해 밤샘 협상을 진행하며 미·중·일·러 등 APEC 회원간 입장 차이를 중재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경주 선언을 비롯한 주요 성과문서 3건 모두에 대해 합의를 도출하는 성과를 거뒀다"고 설명했다.
공동선언 도출이 불발될 경우에는 의장명의의 성명 발표로 대체된 전례가 있다. 이 경우 회원국 간 합의가 무산됐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APEC의 외교적 상징성과 협의체로서의 실질적 의미가 퇴색하게 된다.
양자 회담 중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관세협상 타결과 핵추진 잠수함 건조 승인이 최대 성과로 꼽히고 있다.
한미 양국은 관세 협상 세부내용에 합의하는 데 성공했다.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금융 패키지 중 2000억 달러를 현금으로 투자하되, 연간 한도를 200억 달러로 제한하기로 했다. 두 달 넘게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한미 정상이 만나더라도 최종 결론에 이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으나 예상을 뒤엎었다.
세부 내용이 합의됨에 따라 총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패키지 가운데 2000억 달러는 현금 투자로, 나머지 1500억 달러는 이른바 '마스가 프로젝트(MASGA·Make America Shipbuilding Grea tAgain)'로 명명된 조선업 협력 사업에 투입된다. 신규 선박의 건조 도입 시에 장기 금융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선박금융을 포함한다. 이로써 우리의 외환시장 부담을 줄이는 한편 우리 기업의 선박 수주 가능성을 높였다고 대통령실은 강조했다.
반도체는 우리의 주된 경쟁국인 대만과 대비해 불리하지 않은 수준의 관세를 적용받기로 했으며, 쌀과 소고기 등 농산물에 대한 추가 시장 개방은 방어했다고도 발표했다.
아울러 이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향해 "핵추진잠수함의 연료를 우리가 공급받을 수 있도록 결단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대통령은 "디젤 잠수함은 잠항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북한이나 중국 측 잠수함에 대한 추적 활동에 제한이 있다"며 이 같이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핵잠수함 건조 등 여건 변화에 따라 한국이 핵 추진 잠수함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데 공감을 표한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SNS(소셜미디어)를 통해 "승인했다"고 화답했다.
다만 한미 무역합의가 타결된 지 하루 만에 양국은 미묘한 입장차를 드러냈다. 이에 야당에서는 관세협상의 실질적인 종지부를 찍기에는 여전히 불확실성이 남았다는 공세가 이어지고 있다.
회담 하루 만에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은 자신의 X(구 트위터)에 우리 정부 설명과 다소 차이가 있는 내용을 게시했다. 러트닉 장관은 한미 무역합의를 언급하면서 "한국은 자기 시장을 100% 완전 개방하는 데도 동의했다"고 적었다. 다만 한국이 무엇을 개방으로 했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부연하지는 않았다. 또한 러트닉 장관이 이번 합의에 반도체 관세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국민의힘은 최보윤 수석대변인 논평을 통해 "러트닉 장관은 '반도체 관세는 이번 합의의 일부가 아니다' '한국은 시장을 완전히 개방했다'고 했지만,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불리하지 않은 수준의 관세를 적용받고 민감 품목은 방어했다'고 밝혔다"며 "도대체 협상이 타결된 것이냐, 안 된 것이냐"라고 물었다.
아울러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한미 관세협상 팩트시트 세부 문안을 아직 조정 중'이라고 밝혔다"며 "정부가 '타결됐다'고 자평한 협상이 실상은 문서도 서명도 확정안도 없는 미완의 협상임이 스스로 인정한 셈"이라고 비판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1일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과 한복 소재로 만든 목도리를 두르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이 대통령은 다카이치 사나에 신임 일본 총리와의 회담에서서는 양국 정상 간 '셔틀 외교' 지속 필요성에 뜻을 같이했다. 회담에서 이 대통령은 셔틀 외교 순서상 이제 대한민국이 일본을 방문할 차례라며 다카이치 총리의 지역구인 일본 나라에서의 재회 의지를 표명했고, 다카이치 총리는 "곧 뵙기를 바란다"며 화답했다.
본격적인 회담에 앞서 다카이치 총리가 태극기 앞에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하는 모습이 포착되면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양국은 문화와 인적 교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민감한 '과거사 문제'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국빈 방문은 11년 만에 이뤄지기도 했다. 양국 정상은 회담을 통해 한중 관계의 '호혜적 협력' 강화에 공감했다. 한중 정상회담에는 시 주석이 이 대통령과 같은 푸른색 계열 넥타이를 매고 등장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하지만 한한령 등 정치·문화 분야의 민감한 현안에 대해서는 언급에 그치며 진전된 합의나 구체적 조치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공동 성명은 없었지만 양 정상은 양국 중앙은행간 체결된 통화스와프 계약서 및 양국의 정부부처간 체결된 6건의 MOU(양해각서)에 대한 교환식을 가졌다. 특히 양국은 중앙은행 간 5년 만기 70조원(4000억 위안) 규모의 '원·위안 통화스와프 계약서를 체결했으며, 이는 양국 금융・외환시장의 안정과 교역증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다만 중국은 한국이 미국과 통상·안보 협력에 속도를 내는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미 양국이 핵추진 잠수함 건조 허용 요청과 승인을 주고받은 가운데, 중국은 한미 양국이 핵확산 방지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원칙적 입장을 밝힌 상태다.
이번 정상 외교에서는 각국 정상에게 전달된 선물도 주목을 받았다. 이 대통령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 최고 훈장인 무궁화 대훈장과 함께 천마총 금관 모형을 선물했다. 금관은 본래 왕의 권위와 리더십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이번 선물에는 한반도에서 장기간 평화시대를 유지한 신라의 역사와 함께 한미가 함께 일구어 나갈 한반도 평화 공존과 공동성장의 새시대란 의미가 담겼다.
시 주석의 선물은 최고급 바둑판 소재인 본비자 나무로 제작된 바둑판과 나전칠기 자개원형쟁반이었다. 시 주석이 바둑을 좋아한다는 점을 고려해 준비했다. 최고급 비자나무 원목으로 만든 바둑판 위에 한중 양국의 인연이 아름답게 펼쳐지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한편 지난 1일 이뤄진 경주 APEC 정상회의 두 번째 세션 후반부에는 경주 선언 채택과 함께 이 대통령이 차기 의장국인 중국의 시 주석에게 의장식을 공식 인계하는 행사가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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