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형 가전 생태계, 중국 저가 공세 속도 늦추는 방파제 역할도
그러나 기술·인력·원가 삼중 압력에 붕괴 위험도 점차 커져
ⓒ데일리안AI 이미지
"우리 같은 중소·중견 가전업체들이 있기 때문에 중국 공세가 한국 시장을 단숨에 덮치지 못하는 부분도 있어요. 일종의 '완충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죠."
최근 만난 한 중견 가전업체 관계자의 이 말은 지금 한국 가전 생태계의 현실을 정확히 짚는다. 중국 업체들의 온라인 기반 공세가 거세지만, 이들이 한국 시장을 즉시 장악하지 못하는 데에는 대기업과 중국 업체 사이에서 틈새를 채워온 중소·중견 가전업체들의 존재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가전시장에서 중국 제품은 이미 곳곳에 스며들었다. 전기포트, 공기청정기, 미니오븐, 가습기, 난방기 같은 소형가전은 가격 경쟁력을 내세운 중국 브랜드가 온라인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그럼에도 중국 업체가 한국 가전시장을 순식간에 장악하지 못한 이유는 분명하다.
바로 국내 중소·중견 가전기업들이 수백 개의 생활가전 품목에서 '틈새 생태계'를 꾸준히 지켜온 덕분이다. 대기업이 다루지 않는 생활밀착형 가전, 안전·위생과 직결되는 제품군에서 이들 기업은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며 중국 제품 확산을 늦추는 일종의 산업적 방파제 역할을 해왔다.
한국 소비자 특성도 이 방파제 역할을 강화한다. 가격 민감도도 높으나, 그 외에 안전성, KC 인증, 브랜드 신뢰도, AS 가능 여부가 구매 결정에 강하게 작용한다. 특히 식품 관련·난방·위생 등의 카테고리는 '무조건 저가'가 통하지 않는 대표적인 영역으로, 국내 중소기업이 아직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는 분야다.
그러나 이 완충지대는 점점 취약해지고 있다. 인건비와 원가 부담 탓에 국내 제조 기반을 유지하기 어려워진 업체들이 중국·베트남등으로 생산 기지를 옮기면서, 제품 기획력·설계력 등 고유 경쟁력이 희석되고 있는 경우가 많아지면서다. 브랜드 외에는 차별화 포인트가 많이 사라지고 있다. 게다가 제조 엔지니어·금형·품질 전문가 등 핵심 기술 인력이 빠르게 줄면서 신제품 개발 속도도 느려지고 있다.
그렇다고 이 생태계가 의미 없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이 더 중요하다. 중소·중견 가전업체가 가진 빠른 기획·제조·디자인 전환 능력은 대기업이나 글로벌 제조사는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민첩성'이다. 문제는 이 민첩성이 산업적 역량으로 축적되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버티기 전략'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중국 업체들의 공세는 더욱 빨라질 것이고, 이 완충지대가 무너지는 속도도 점점 가속화할 수 있다. 산업계와 정책이 이 생태계를 단순한 '시장 잔여 영역'이 아니라 한국 제조업이 유지해야 할 전략적 자산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한국 가전 시장은 머지않아 또 하나의 산업 기반을 잃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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