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솟는 물가 소비 위축 직격탄 맞아
회식, 외식 줄며 소주 수요 급감
‘불황엔 라면’도 멈춘 국내 소비 정체
작은 사치도 포기하는 초절약 소비 확산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 소주 상품이 진열돼 있다.ⓒ뉴시스
지갑을 닫는 서민들의 일상이 보편화되면서 불황의 ‘마지막 피난처’로 불렸던 서민식품들마저 힘을 잃고 있다. 전통적으로 불황에 강세를 보였던 소주와 라면 등 ‘식품’도 치솟는 물가와 소비 위축을 직격탄을 맞으며 예전 같은 수요를 견인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통상 서민음식으로 통했던 식품들은 경기침체 시 외식 대신 소비하는 대체품 성격을 띠어 매출에 상승세를 보였다. 그러나 이번 불황에는 소비자들이 대체품조차 찾지 않고 소비 자체를 줄이고 있다.
식품의 경우 필수 소비재로 분류돼 경기 악화 때 오히려 지배적 지위를 얻는다. 저가형 상품을 선호하는 알뜰 소비 경향이 강해지면서다. 하지만 최근에는 '서민음식'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물가가 급등해 저가형 상품 카테고리가 축소된 상태다.
3분기 주류 실적을 살펴봐도 분명하다. 하이트진로의 3분기 매출은 작년 동기 대비 2.4% 줄어든 6695억원을 기록했다. 주류 시장의 전반적인 침체가 이어지면서 실적도 영향을 받았다. 특히 소주보다는 맥주가 날씨의 영향을 받으면서 타격을 입었다.
한때 겨울철 뼈 속까지 시린 날씨와 경기 침체는 ‘한 잔’의 소주를 부추겼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소비 양극화와 주류 선택의 다변화, 날씨보다 라이프스타일 변화가 시장을 좌우하면서 추위와 불황이 곧 소주 매출 상승을 보장하지 않는 새로운 소비 지형이 형성되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외식업 경기가 급격히 얼어붙은 것이 소주 판매에도 직접적인 타격을 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고물가·고금리로 소비자들이 지출을 줄이면서 외식 횟수가 눈에 띄게 감소했고, 회식·모임 문화 역시 위축되면서 식당 내 주류 소비가 전반적으로 줄어들었다.
외식업계 한 관계자는 “손님이 줄어들면 당연히 주류 매출도 동반 하락하고 예전처럼 ‘식당은 어려워도 소주는 버티는’ 공식이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며 “외식 빈도가 줄어들고 술자리가 줄어든 탓에 식당 내 소주 소비 자체가 예전만큼 나오지 않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이 라면을 살펴보고 있다.ⓒ뉴시스
주류 시장과 동시에 국내 라면 시장도 정체기다. 한때 ‘불황엔 라면’ 공식은 철석 같았다. 외식비 부담이 커지는 시기 ‘한 끼를 가장 적은 비용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선택지’로 자리 잡으면서 확실한 수혜를 받았다. 라면업계는 경기침체의 반사이익을 온몸으로 누렸다.
실제로 1997년 IMF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대형 불황이 닥칠 때마다 라면 판매량은 두 자릿수 이상 증가했다. ‘싸고, 든든하고, 어디서든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대표적인 생계형 식품으로, 가계지출이 줄어들수록 라면 수요는 오히려 뛰었다.
그러나 지금은 분위기가 다르다. 해외 시장에서 매년 기록적인 성장세를 보이는 것과 달리, 국내 라면 소비는 정체 기조가 뚜렷한 상황이다. 경기 한파가 거세져도 라면이 예전처럼 폭발적으로 팔리지 않는 데는 시장 구조와 소비자의 선택이 크게 달라진 영향이 크다.
불황일수록 저렴하면서도 기분 전환이 되는 립스틱 소비가 늘어난다는 ‘립스틱 이론’도 옛말이 됐다. 예컨대 2001년 9·11 테러 직후 에스티 로더의 립스틱 판매가 11% 급증한 사실은 불확실성 속에서도 ‘작은 사치’를 통해 불안을 달래려는 인간 심리를 보여준다.
반면 오늘날의 소비자는 립스틱 한 개로 위안을 얻지 않는다. 화장품의 경우 다이소 중심의 저가형 화장품과 초소형으로 나오는 미니 화장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소유보다 경험을, 가격보다 가치를 중시하게 된 것이다. 미니 화장품은 일반 제품의 3분의 1 수준으로 가격도 그만큼 적게 책정된다.
문제는 이 같은 흐름세가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경기침체가 길어지는 가운데 금리·물가·환율이 동시에 고점에 머물며 향후 소비자 지출을 더 움츠러들게 할 요인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이자 부담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내년 상반기 식품가격의 추가 인상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다만 외식업체들이 실제로 가격을 올릴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정부가 최근 식품·외식 가격 인상 감시를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획재정부와 공정거래위원회는 외식 가격 모니터링을 확대했고, 식약처도 ‘슈링크플레이션’까지 점검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외식업계 관계자는 “지금은 특정 품목이 불황을 버텨주는 시장이 아니라 소비 자체가 줄어드는 구조적 위기”라며 “내년 상반기 추가 가격 인상까지 겹칠 경우 서민 체감경기는 더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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