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문 앞에서 발길을 돌린 20·30대가 160만명에 육박한다. 국가데이터처(옛 통계청)가 지난해 12월 10일 발표한 ‘2025년 11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20‧30대 가운데 실업자·취업준비생·'그냥 쉰다(쉬었음)'라고 답한 표본을 합친 인구가 158만 9000명, 2030세대 전체 인구(1253만 5000명)의 12.7%에 이른다. 특히 '그냥 쉰다'고 답한 20‧30대는 71만 9000명으로 2003년 조사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국가데이터처 지표누리에 공표된 '청년 고용동향'을 봐도 2025년 11월 기준 청년층(15~29세) 고용률은 44.3%로 전년 동월보다 1.2%포인트 떨어지며 19개월 연속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JTBC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찾지 못해 노동시장 밖에 서 있는 청년들이 늘어나는 동안 TV와 OTT 속 2030의 모습은 현실과 쉽게 겹쳐지지 않는 지점에 서 있다. 2025년 한 해 편성표를 채운 주요 드라마들을 보면 법조·의학·공기업 등 안정적인 전문직 서사가 줄줄이 이어졌고, 극 중 주인공의 연령대는 대부분 20‧30대다.
JTBC '에스콰이어: 변호사를 꿈꾸는 변호사들'은 대형 로펌 율림을 배경으로 신입 변호사 강효민(정채연 분)과 파트너 변호사 윤석훈(이진욱 분)이 사건을 해결해 가며 성장하는 과정을 그렸다. tvN '서초동'은 서초 법조타운에서 일하는 어쏘 변호사(로펌에 고용돼 급여를 받고 일하는 변호사) 다섯 명의 일상을 따라가며 야근과 실무에 치여도 결국은 능숙하게 사건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의학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중증외상센터'는 천재 외과의 백강혁(주지훈 분)이 대학병원 외상팀을 이끄는 의사로 등장한다. 백강혁의 1호 제자 양재원(추영우 분)은 함께 응급수술과 대형 참사를 연달아 해결하며 중증외상센터를 키워가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진다. tvN '언젠가는 슬기로운 전공의 생활'도 산과·부인과 등 각 과에 배치된 레지던트 1~2년 차들의 병원 생활을 그리는 작품으로, 힘들지만 어쨌든 전문의가 되는 길에 올라선 청춘들이다.
물론 드라마 속 전문직·고소득층 주인공 자체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다만 과거 드라마들이 의사·변호사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방식은 지금과 결이 조금 달랐다. 의사를 다루더라도 지방 의대를 나온 비인기과 의사의 이야기, 법조인을 다루더라도 국선전담 변호사처럼 상대적으로 덜 빛나는 지점에 서 있는 인물을 다룬 작품들이 눈에 띈다. 화려한 직업 타이틀보다 그 안에서 겪는 부담과 현실적인 애로사항을 함께 보여주려는 쪽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MBC
2007~2008년 방영된 MBC ‘뉴하트’는 지방 의대 출신 흉부외과 레지던트 이은성(지성 분)을 내세운다. 위험한 수술은 많지만 병원 수익에는 도움이 안 돼 늘 인력난에 시달리는 흉부외과라는 설정을 반복해서 보여주며 병원 안에서도 비인기과에 속한 의사를 따라간다. 2013년 나온 SBS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장혜성(이보영 분) 역시 대형 로펌이 아닌 시 소속 국선전담 변호사로 피고인과 피해자 사이에서 욕을 먹고 수임료가 거의 되지 않는 사건들을 떠안는 인물이다.
2014년 tvN에서 방영된 '미생'의 장그래(임시완 분)는 대기업에 인맥으로 입사한 일명 '낙하산'이지만 실적 압박과 정규직 전환 경쟁, 구조조정 위기 속에서 계속해서 흔들리는 청년 노동자의 얼굴을 정면에 내세웠다. 2009~2010년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 속 정음(황정음 분)도 지방대 졸업반으로 카드빚과 생활비에 쫓겨 과외·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20대를 현실적으로 표현했다.
같은 전문직을 다루더라도 드라마가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확연히 달라졌는데 최근의 드라마들은 같은 직업을 더 노골적인 계급·생활 판타지의 틀 안에서 사용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SBS '나의 완벽한 비서'의 경우, 헤드헌팅 회사 피플즈를 업계 2위로 키운 대표 강지윤(한지민 분)과 일도 생활도 완벽한 남자 비서 유은호(이준혁 분)의 로맨스를 그린다. 드라마가 집중하는 건 인재 영입 과정에서 벌어지는 오피스 로맨스와 힐링 서사다. 회사의 구조조정, 채용 탈락자, 이직 실패자의 현실은 배경으로만 언급될 뿐 메인 내용이 아니다.
ⓒSBS '우주메리미'
같은 방송사의 '우주메리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노골적인 재벌 판타지를 전면에 세운다. 여자 주인공 유메리(정소민 분)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디자인 회사 메리디자인의 대표로, 50억원대 타운하우스에 당첨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메리와 엮이는 남자 주인공은 80년 전통 제과기업 4세 김우주(최우식 분)다. 주변 인물 역시 백화점 상무와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구성돼 이들의 고민은 월세·부채·실업이 아니라 '위장 결혼이 들통날까, 서로의 감정을 어떻게 인정할까'에 가깝다.
과거에는 조연이나 악역이 맡던 전문직·상류층 설정이 이제는 주인공과 2030 사회초년생 캐릭터의 기본값이 됐다. 자연스럽게 이들의 생활고·학자금·월세 같은 현실적인 고민은 화면 밖으로 밀려나고 화면 안에는 완성도 높은 세계관과 로맨스, 주인공의 성장 서사만이 남는다. 그 사이에 등장하는 의뢰인·주변 인물의 일회성 고민, 사회적 이슈는 한두 회 스쳐 지나가는 타인의 이야기로 소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말처럼, 힘든 현실에서 잠시 도피하게 해 줄 판타지 서사가 필요할 때도 있다. 문제는 이런 설정이 2030을 그리는 기본값처럼 굳어지면서 현실의 2030이 마주한 상황과 점점 더 괴리된 이미지만 반복될 때다. 청년 백수 158만명 시대에 드라마 속 2030이 당연하다는 듯 의사·변호사·공기업·재벌 2‧3세로 출발하는 장면이 계속된다면 그 간극이 어떤 영향을 낳을지에 대해선 제작진이 한 번쯤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최소한 2030 시청자가 자신의 삶을 투영할 수 있는 얼굴이 성공한 전문직과 상류층 이외에도 조금 더 다양하게 등장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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