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안나 역 옥주현·김소향·이지혜 트리플 캐스팅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이유가 다르다.”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강렬한 첫 문장으로 꼽히는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단순한 치정극이 아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사랑과 결혼, 가족과 도덕, 그리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집요하게 파고든 작품이다.
ⓒ마스트인터내셔널
7년 만에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으로 돌아온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는 이 묵직한 메시지를 무대라는 한정된 시공간으로 옮겨온다. 정략결혼으로 건조한 삶을 살던 안나가 젊은 장교 브론스키를 만나 걷잡을 수 없는 열정에 빠져들고, 결국 사회적 파멸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작품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원작의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고자 한다.
이러한 메시지를 시각화하기 위해 뮤지컬이 선택한 방식은 ‘압도적인 물량 공세’다. 이번 프로덕션은 러시아 대극장 뮤지컬 특유의 장대한 스케일을 고스란히 재현하며 관객의 눈과 귀를 쉴 새 없이 몰아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무대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대형 LED 영상이다. 차가운 눈보라가 치는 기차역부터 화려한 샹들리에가 빛나는 무도회장, 광활한 러시아의 영지까지, 시시각각 변하는 LED 배경은 19세기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무대 위에 생생하게 불러온다.
여기에 장르를 넘나드는 퍼포먼스가 더해져 볼거리를 극대화한다. 당대 뛰어난 오페라 가수 패티의 절창이 객석을 압도하는 오페라 극장 장면, 우아하고 유려한 앙상블의 발레 군무와 무대 위를 가로지르는 피겨스케이팅 장면까지 등장한다. 무대는 단 1초의 지루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화려한 의상과 역동적인 안무, 웅장한 음악으로 가득 채워진다.
ⓒ마스트인터내셔널
하지만 무대 위의 장식들이 화려해질수록, 역설적으로 톨스토이가 남긴 서사의 여백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국내 번역본 기준으로 3권, 무려 18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대서사시를 단 150분 분량의 뮤지컬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서사의 결손 때문이다.
뮤지컬은 안나와 브론스키의 비극적인 로맨스에만 철저히 초점을 맞춘다. 그 결과 원작에서 안나의 파괴적인 사랑과 완벽한 대척점을 이루며 삶의 건강한 가치를 증명해 내는 레빈과 키티의 서사는 지나치게 압축된다. 레빈이 농촌에서 흙을 일구며 깨닫는 노동의 신성함과 진실한 사랑의 과정은 안나의 허망한 파멸을 더욱 비극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원작의 핵심 축이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이들의 이야기는 그저 안나의 치정극 사이사이를 메우는 가벼운 브릿지나 구색 맞추기용 곁가지로 전락했다.
주인공 안나의 심리 묘사도 속도전에 희생된다. 안나가 아들과 안정적인 가정을 버리면서까지 왜 그토록 브론스키에게 맹목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는지, 그 치열하고도 고통스러운 내적 갈등은 충분히 설득되지 않는다. 무대를 가득 채운 화려함 속에서 묘한 공허함이 느껴지는 이유다.
안나 역은 옥주현·김소향·이지혜가, 브론스키 역은 윤형렬·문유강·정승원이, 카레닌은 이건명·민영기·백승렬이 연기한다. 공연은 3월 2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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