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아닌 기만' 코트 발연기 강제감상 언제까지
자기보호 위해 필요악으로 시작된 플레이가 잡다한 꼼수로 변질
페어플레이 정신 위배..사후 비디오판독 등 NBA 제도 참고
축구나 농구 같이 신체접촉이 잦은 구기 종목에서는 종종 심판을 현혹시키는 ‘눈속임 동작’을 하는 선수들이 있다.
KBL에서는 정식용어로 '시뮬레이션 액션'이라 칭하고 있지만, 대중적으로는 마치 과장된 헐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는 의미로 '헐리우드 액션'이라는 표현이 보편적으로 쓰인다. 종목과 국적을 막론하고 이런 행위들은 스포츠의 페어플레이 정신에 위배되는 비신사적인 기만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KBL에서도 이러한 눈속임 동작에 대한 논란은 오래됐다. 최근에는 20일 서울잠실학생체육관서 벌어진 ‘2013-14 KB국민카드 프로농구’ SK-오리온스전을 통해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더구나 헐리우드 액션으로 인한 오심에 항의하던 선수와 감독이 테크니컬 파울에 이어 퇴장까지 당하는 사태가 발생, 국내 프로농구에 만연한 눈속임 관행에 대한 비판과 심판의 자질논란, 재경기 규정 등 뜨거운 후폭풍을 불러왔다.
사실 이 문제를 단순히 특정 선수나 심판 자질에만 초점을 맞춰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만큼 눈속임 관행은 한국농구계에 만연했다. 현재의 스타급 선수들은 물론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는 다수의 농구인들도 현역시절 이런 관행에서 자유롭지 못할 만큼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유독 한국농구에는 이런 눈속임 동작이 만연한 것일까. 정설은 없지만 눈속임 동작에 대한 논란이 처음 제기된 것을 따져보면 80~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주목할 만하다.
당시 한국농구의 어두운 그림자 중 하나는 과격한 '반칙성 플레이'였다. 지금처럼 농구 중계기술이 발달하지 않고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는 코트에서 심판의 눈을 속이거나 사각지대에서 일어나는 파울성 플레이가 빈번했다.
허재 등 정상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는 상대의 주득점원을 저지하기 위해 소위 '셰퍼트' 특명을 맡은 선수들이 나섰다. 열심히만 수비하면 좋았겠지만 종종 빗나간 승리욕으로 부상의 우려가 있는 고의적이고 악질적인 반칙으로 도발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스타플레이어들은 대부분 이런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심판이나 구단들은 암묵적인 관행 속에 선수를 보호하지 못했다.
결국, 심각한 부상이나 팀간 감정적인 폭력사태까지 비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1980년대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현대전자와 기아자동차의 폭력사건, 1994년 농구대잔치 연세대-삼성전자전에서 벌어진 서장훈 목 부상 등은 실력보다 폭력으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에 급급했던 부끄러운 한국농구의 자화상이다.
그런데 이런 파울이 심해지자 위협을 느낀 선수들도 점차 대처하는 요령이 생겼다. 상대의 집중견제를 받는 슈터들은 몸싸움이나 위치선정 시에 상대가 조금만 붙어도 과장된 동작으로 넘어지거나 비명을 지르는 등 소위 '연기'가 늘었다. 90년대 유독 눈속임 동작이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던 모 대학팀은 '액션 스쿨'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이런 경향은 프로화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과격한 파울로부터 선수들이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필요악에서 출발했던 눈속임 동작이 세월을 거듭할수록 잡다한 요령만 남은 '꼼수'로 변질된 것이다.
프로 초창기 가장 큰 피해자는 외국인 선수들이었다. 체구가 크거나 험상궂은 선수들이 주요 타깃이었다. 당시 몇몇 외국인 선수들은 "닿지도 않았는데 비명을 지른다. 한국 선수들은 너무 엄살이 심하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지만 요즘은 외국인 선수들도 한국무대에 적응(?), 이제는 국내 선수들 뺨치게 연기력을 지녔다.
가장 큰 문제는 KBL이나 농구인들 자체가 눈속임 동작의 관행이 주는 심각성을 그다지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피해를 입을 경우에는 항의하지만 그것은 주로 헐리우드 액션을 잡아내지 못한 심판에 대한 원망에 국한된 것일 뿐, 똑같은 상황이 반대로 자기편에 의해 이루어지면 언제 그랬냐는듯 침묵한다.
심지어 대학과 프로에서 모두 감독을 지내고 지금은 현장을 떠난 한 농구인은 "(헐리우드 액션도) 머리 좋은 선수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농구팬들을 황당하게 만들기도 했다. 결국, 눈속임을 잘하는 선수는 영리하다고 칭찬받고, 요령 없이 우직하게 페어플레이하는 선수만 손해를 보는 구조니 근본적으로 개선이 될 리가 없다. 설령 심판의 눈은 속일 수 있다고 해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한 중계 기술과 농구팬들의 안목까지 속일 수는 없다.
NBA는 플로핑(flopping)에 대한 규제를 점점 강화하는 추세다. NBA 사무국은 최근 몇 년간 눈속임 동작이 뜨거운 감자가 되면서 2012-13시즌부터 플로핑 규정을 보완해 엄격한 제재에 나섰다. 정규리그를 기준으로 플로핑 판정을 받은 선수에 대해서는 첫 번째는 경고, 두 번째는 벌금 5000 달러를 내도록 했고 이후 누적될수록 벌금 액수가 커진다.
해당 경기에서 잡아내지 못한 눈속임 동작은 후일 비디오 판독에 의해서라도 반드시 차후 징계를 내리도록 했다. 많은 선수들이 이로 인해 경기 후 징계를 받고 벌금을 물었다. 사무국뿐만 아니라, 언론이나 팬들 사이에서 플로핑을 남발하는 것을 페어플레이에 어긋나는 행위로 비판하는 여론이 보편화 됐다.
물론 KBL에서도 관련 규정은 있다. 프로농구 규칙 제12장 파울과 벌칙 중 제79조 '시뮬레이션 액션'조항에 따르면, 눈속임 동작을 저지른 선수에게는 벌금을 부과하도록 되어있지만 고작 20만 원에 불과하다. 몸값만 수억 수천 받는 프로선수들에게는 징계가 아니라 껌값 수준이다.
눈속임 동작은 장기적으로는 한국농구의 기술적 발전에도 역행한다. 정당한 몸싸움이나 기술로 승부하기보다는, 요령에만 길들여진 선수들에게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심지어 착실하게 기본기를 다져야 할 대학과 고교 등 아마 스포츠에서조차 성적지상주의에 빠져 쉬쉬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당연히 이런 동작은 국제무대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많은 한국 선수들이 국제무대에 나가면 국내와 전혀 다른 심판 판정에 당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잘못된 관행을 방치할 경우, 장기적으로 한국농구의 국제 경쟁력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눈속임 동작은 기술이 아니라 기만이다. 특정 선수나 구단만이 아니라, 농구계 차원에서 근본적인 문제인식 개선에 대한 의지가 없는 한 농구팬들은 내일도 코트에서 펼치는 선수들의 한심한 ‘발연기’를 강제로 감상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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