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를 비롯해 2002 한일월드컵에서 4강에 올랐던 거스 히딩크 감독 이하 축구대표팀 선수들이나 한국 체조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양학선 같은 선수도 한국 스포츠의 역사적인 관점에서 그 업적의 가치를 평가해 보자면 당연히 최고훈장을 받아 마땅하다. ⓒ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올해부터 시행되는 강화된 체육훈장 서훈 기준이 논란이 되고 있다.
태릉선수촌장을 지냈던 새누리당 이에리사 의원은 지난 13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정부가 올해부터 체육훈장 수여 기준을 크게 강화해 이제는 양궁이나 쇼트트랙을 제외하면 어떤 종목에서도 1등급 훈장을 사실상 받을 수 없게 됐다”고 꼬집었다
이어 “심지어 김연아도 1등급인 청룡장을 받을 수 없다”며 “체육훈장 기준을 지난해 수준으로 되돌려 체육인들이 많은 영예를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육훈장의 서훈은 상훈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상훈법 제17조의4(체육훈장) 규정에 따르면, 체육훈장은 "체육 발전에 공을 세워 국민체육의 위상을 높이고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며 이를 5등급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에 따라 체육훈장은 청룡장(1등급), 맹호장(2등급), 거상장(3등급), 백마장(4등급), 기린장(5등급), 포장으로 등급의 체계가 있다.
체육훈장의 서훈 기준은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 성적에 따른 누적된 ‘포인트’인데 문제는 올해부터 변경된 서훈 기준이 등급별로 대폭 상향조정, 체육훈장 서훈 대상자들이 수훈할 수 있는 훈장의 등급이 낮아지게 됐다는 점이다.
올해부터 적용되는 훈장수여 서훈기준은 청룡장 1500점(기존 1000점) 이상, 맹호장 700점(기존 500점) 이상, 거상장 400점(기존 300점) 이상, 백마장 300점(기존 200점) 이상, 기린장 250점(기존 150점) 이상이다. 주요 대회별 평가 점수는 올림픽대회의 경우 금메달 600점, 은메달 360점, 동메달 200점이며 아시안게임의 경우 금메달 150점, 은메달 90점, 동메달 50점이다.
세계선수권대회는 종목마다 주기에 차이가 있어 4년 주기 대회는 금메달 300점, 은메달 180점, 동메달 100점, 3년 주기 대회는 금메달 250점, 은메달 150점, 동메달 80점, 2년 주기 대회는 금메달 150점, 은메달 90점, 동메달 50점, 1년 주기 대회는 금메달 100점, 은메달 70점, 동메달 30점이 부여된다.
기존 서훈 기준대로라면 체육훈장의 최고등급인 청룡장을 수훈할 수 있었던 체육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번 서훈기준 변경으로 크게 실망할 수 있는 상황이다. 변경된 기준대로라면 쇼트트랙이나 양궁 같은 한국이 국제적으로 최정상권에 있는 종목 외의 선수들은 체육훈장 청룡장을 수훈하기 어렵게 된다. 당연히 체육인들로부터 불만의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에 이에리사 의원이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여자 탁구 국가대표 출신으로 한국 구기 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세계선수권을 제패했던 ‘사라예보의 영웅’이자 태릉선수촌장을 역임했고, 대한체육회장 후보에도 올랐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메달 획득을 위해 국가대표 선수들이 쏟아내는 땀과 눈물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이에리사 의원은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김연아 얘기를 꺼냈다. 이 의원은 김연아가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금메달, 2014 소치올림픽 은메달 등으로 체육훈장서훈 ‘포인트’ 1424점을 획득, 지난해의 경우에는 청룡장을 받을 수 있었지만 새로 바뀌는 규정에 따른다면 기준(1500점)에 76점이 모자라 수상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당연히 많은 언론이 이에리사 의원의 문제제기를 보도하면서 김연아가 청룡장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보도에 무게를 뒀고 여론은 들끓었다. 특히, 나경원 전 의원의 청룡장 수훈 사실이 알려지면서 네티즌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지난해 ‘2013 동계스페셜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에 기여한 공로로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김연아도 수훈하지 못한 청룡장을 체육인도 아닌 나 전 의원이 수훈한 사실은 논란거리가 되기 충분했다.
체육훈장 서훈 기준 변경 문제를 공론화하려는 이 의원의 시도는 김연아와 ‘뜻밖의 원군’ 나 전 의원 덕에 일단 성공한 셈이다. 사실 올해부터 바뀌는 체육훈장 서훈 기준은 이미 3년 전인 2011년 5월 12일에 이루어진 내용이다. 정부가 이처럼 서훈기준을 개정한 이유는 엘리트 체육보다는 생활체육과 장애인체육 등 일반인에 대한 포상으로 체육훈장 서훈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취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현재의 논란은 어찌 보면 다소 새삼스러운 논란으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단순히 김연아가 최고등급의 체육훈장 수훈 여부가 아니라 향후 한국의 체육정책의 변화와 그 변화의 흐름에 따라 훈장 서훈 기준을 수정할 때,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느냐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있었는지 여부다.
최근 관련 보도들을 살펴보면 김연아와 같은 살아있는 전설과도 같은 선수가 청룡장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불합리하다는 식의 논리만이 상황을 지배했을 뿐, 정부가 왜 이런 방향의 정책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한 배경설명이나 그에 따른 토론을 시도하는 보도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와 관련, 지난해 1월 22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체육발전 유공자 서훈기준 개선방안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당시 ‘스포츠조선’ 보도에 따르면, 문화체육관광부의 연구의뢰를 받아 이 사안을 집중 연구 중이던 박영옥 체육과학연구원 박사가 발제에 나섰다.
그는 "훈장은 명예성에 기초해 권위성 희소성 공정성 보상성의 원칙하에 빛이 난다"고 전제한 뒤 "문화 부문의 경우 1등급인 금관훈장을 받는 사람은 지난 2008년 이후 단 2명에 불과했다. 체육훈장은 상대적으로 너무 많다. 지난해 청룡장 수상 대상자가 20명 가까이 된다"며 희소성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 외에도 메달리스트 등 국제대회 성적, 포인트에만 집중되는 서훈 요건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면서 엘리트 선수의 경기력에 따른 성과뿐 아니라 프로 스포츠, 스포츠과학 등으로 '공적'의 외연을 넓히는 방안을 제안했다. 결과뿐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운동학적 수행이 가지는 직 간접적 사회문화적 영향력에 대한 고려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토론회장에 모인 체육인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이날 토론자 가운데 한 명이던 장영술 국가대표 양궁 총감독은 "서훈 대상이 많으니 줄이자고 하는데, 세계 5위에 들다보니 서훈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 서훈자의 나이가 적다고 하는데, 운동선수가 젊지 늙어서 받는 사람이 어딨냐"며 "선수들은 하루에 4만원 받으며, 1년 365일 자신과 국가의 명예를 위해 뛴다. 결국 사기의 문제다. 열악한 처우를 개선해도 모자랄 판에 서훈기준을 높인다니 어안이 벙벙하다"고 발제자의 의견을 비판했다.
발제자의 주장이나 장 감독의 주장 모두 생각해 볼만한 의견이었고, 훌륭한 토론이었다고 보인다. 하지만 당시의 토론은 김연아라는 키워드가 확실하게 들어간 지금 정도의 큰 관심은 받지 못했다.
작년 토론회 이후 문화체육관광부는 정부가 올해부터 적용하는 서훈기준의 완화 및 개선안을 제안했다. '올림픽의 영예성을 감안해 올림픽 금메달 평가점수를 500점에서 1000점으로 상향조정하고, 청룡장 서훈 기준을 기존의 1000점으로 유지하자'는 건의안을 정부(행정안전부)에 제출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에게 청룡장을 서훈하자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전행정부는 지난 5일 문체부에 '체육훈장 서훈기준 개선 건의에 대한 회신'을 보냈다. 안행부는 '장관님 방침'이라는 제하에 '엘리트체육에 집중된 포상은 바람직하지 않음. 생활체육, 장애인 체육활동 등 일반인에 대한 포상으로 방향전환, 변화된 스포츠환경 등을 고려해 당초 문체부에서 체육계 의견 수렴 후 요청한 2014년도 서훈기준 유지'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열흘도 안 돼 안행부는 입장을 바꿨다. 각계 의견을 수렴해 기준 점수 조정 방안을 협의한다는 방침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연아라는 존재가 이 문제에 개입되면서 여론을 움직인 것이 큰 원인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제 체육인들에게 김연아는 이제 만병통치약 내지 만사형통의 ‘부적’과 같은 존재가 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김연아가 스포츠행정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될 때 그가 가질 수 있는 영향력을 미리 엿볼 수 있는 사례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정부가 스포츠 정책을 큰 틀에서 볼 때 엘리트 스포츠에서 생활 스포츠로 전환, 선진국형 스포츠 정책을 수립하려는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오랜 기간 연구 끝에 결정한 정책을 김연아를 둘러싼 논란 한 방으로 흔들리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과연 정상적인 것인지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스포츠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포인트’ 같은 서훈 기준과는 상관없이 많은 대한민국의 체육인들이 체육훈장 청룡장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연아를 비롯해 2002 한일월드컵에서 4강에 올랐던 거스 히딩크 감독 이하 축구대표팀 선수들이나 한국 체조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양학선 같은 선수도 한국 스포츠의 역사적인 관점에서 그 업적의 가치를 평가해 보자면 당연히 최고훈장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 결정은 정책을 결정하는 국회나 정부, 그리고 관계자들의 치열한 토론과 합의로 도출이 되어야 맞는 것이지 사회적 영향력이 큰 특별한 어떤 존재의 힘으로 여론이 요동치게 해 정책변경을 유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은 모양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일단 이 문제가 공론화되는 상황인 만큼, 지금이라도 이 문제에 관해 진지하고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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