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0일, 그들이 밤새워 독주를 마시는 이유는...
<유럽에 미치다⑪-스웨덴 웁살라>'자유로움'과 '올바름'의 철학이 있는 도시
웁살라(Uppsala). 이 생소한 도시가 지구상 어디에 붙어 있는 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거의 9년 전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주위 사람들에게 “웁살라라는 도시 알아?”라고 물었을 때 100명 중 95명에게서 되돌아오는 대답은 “몰라”였다. 9년 여 동안 제법 꾸준히 주위 사람들에게 ‘웁살라’라는 도시에 대해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한민국에서 웁살라가 어느 나라의 도시인지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2005년 7월 11일, 출장으로 스웨덴을 처음 갔을 때 웁살라는 잠시 스쳐지나가던 곳이다. 그래서 웁살라라는 낯선 지명도 머릿속에 각인되지 않았다. 몇 번을 되새기고, 겨우겨우 기억해 내야 생각 날 듯 말 듯 했던 도시.
하지만 2010년 어느 날 우연히 서점 한 귀퉁이에서 집어든 소설가 박수영의 ‘스톡홀름, 오후 두 시의 기억’이라는 책에서 그 웁살라를 다시 만났다. 실은 스톡홀름이라는 제목 때문에 책꽂이에서 빼냈지만 이 책은 스톡홀름의 이야기가 아닌 웁살라의 이야기였다. 단번에 이 책에 깊이 빠져들었고, 책장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웁살라가 마치 여러 번 다녀온 적이 있는 익숙한 동네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무작정 웁살라로의 여행을 꿈꿨고 반년이 채 지나기 전 그 웁살라에 다시 갈 수 있었다.
웁살라. 지금도 네이버나 다음에서 이 단어를 검색해도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 어지간해서는 웁살라를 여행했다는 여행자의 글도 볼 수는 없다. 다만 간간히 웁살라에서 공부한 유학생들의 이야기가 눈에 띌 뿐이다. 그 정도로 우리들에게는 낯선 도시 웁살라.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에서 북서쪽으로 약 65km 떨어진 곳. 스톡홀름 중앙역에서 교외선 기차를 타면 불과 40여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웁살라는 사실 스웨덴에서 스톡홀름과 예테보리, 말뫼 다음으로 큰 제4의 도시다. 물론 제4의 도시라고 해봐야 15만 명 남짓한 인구가 고작이지만. 도시 전체 넓이가 서울의 12분의 1, 서대문구와 은평구를 합쳐놓은 정도니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시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크기다.
하지만 웁살라는 16세기 이전 스웨덴의 수도였고, 바이킹의 역사가 고스란히 숨 쉬고 있는 곳이다. 11세기 기독교가 스웨덴에 전파될 때 기독교의 침입을 온몸으로 거부하며 항전했던 ‘이교도’ 스베아(Svea)인들의 고향이자 스웨덴의 전설적인 고대왕국 윙링 왕조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즉, 웁살라의 역사는 스톡홀름의 역사보다 훨씬 앞선다. 그래서 스웨덴에서는 웁살라를 사실상 스웨덴 역사의 시작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게다가 1477년 설립된 웁살라 대학교가 도시의 중심이자 전부라고 할 정도로 스웨덴은 물론 북유럽 학문의 중심지라는 점에서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와 비교되기도 한다. 전 인구의 15%가 웁살라 대학생이고, 나머지도 웁살라 대학교의 교직원이거나 또는 그 대학에 기댄 삶을 사는 사람들이니 전 인구가 웁살라 대학교의 직접 영향권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웁살라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작가주의 영화의 거장으로 불리며 ‘제7의 봉인’, ‘화니와 알렉산더’ 등의 작품으로 영화학도들의 멘토가 되고 있는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고향이기도 하다. 즉, 도시 전체를 휘감고 있는 학구적이고 진중하면서도 스톡홀름보다도 더 젊은 정서가 가득한 묘한 고대의 도시인 셈이다.
웁살라의 첫 얼굴은 중앙역이다. 몇 년 전에 디자인 강국 스웨덴다운 감각으로 새로 지어진 신 역사는 바로 옆에 있는 구 역사와 묘한 앙상블을 이루면서 이곳이 1000년 이상의 오래된 도시라는 것을 잊게 해준다. 특히 역 바로 옆에는 수없이 많은 자전거가 보관된 자전거 전용 주차장이, 이 도시는 고도가 아닌 젊은 감각의 도시임을 애써 소리치고 있다. 스톡홀름도 자전거 도로가 잘 발달됐지만 웁살라는 거의 완벽한 자전거 환경이 갖춰져 있다고 자랑할 만큼 자전거가 주민들의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웁살라의 도심을 이루는 주요한 건물들은 거의 대부분이 웁살라 대학교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웁살라 대학교는 캠퍼스가 울타리 안에 다소곳이 모여 있는 형태가 아니고, 도시 전체가 캠퍼스다. 사실 웁살라에 살고 있는 주민이나 웁살라 대학교의 학생이 아닌 다음에는 어느 건물이 대학의 강의실과 기숙사고, 어느 건물이 일반 주민들의 주거지이며, 어느 건물이 관공서이고 호텔인지를 구분할 수 없다. 이곳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한 한국인 대학생은 “그냥 여기 있는 건물은 모두 대학교 시설이고, 여행객들도 그 대학교의 시설에 의탁해 숙식을 제공받는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유독 눈에 띄는, 무언가 특별해 보이는 건물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북유럽 최고의 고딕 건축물이라는 웁살라 대성당(Uppsala Domkyrkan)이다. 1260년 건축되기 시작해 1435년 웁살라의 대주교였던 야코프 울프손에 의해 무려 175년 만에 완성된 웁살라 대성당은 그 규모면에서도 북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16세기 스웨덴이 루터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이후에도 웁살라 대성당은 가톨릭 성당으로 남아있다.
이 성당 공사에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건축에 동원됐던 석공들이 대거 참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성당 앞쪽 2개의 첨탑과 북쪽 한 개의 첨탑은 웁살라 어디에서도 잘 보일 정도인데, 불행히도 앞쪽 2개의 첨탑은 1702년 화재로 불탄 후 2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재건축된 것이다. 북쪽의 탑에는 웁살라의 대표적인 보물들을 전시한 박물관이 있다.
대성당의 내부는 깔끔하고 새 것 같은 느낌의 외부보다 오래된 성당의 느낌이 강하다. 웅장한 고딕 양식의 전형을 보이면서도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등으로 인해 성당 내부가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성당 안에는 스웨덴 역사에 있어서 상당한 의미를 지닌 2명의 무덤이 있다. 1523년 당시 스웨덴을 지배하던 덴마크 세력을 몰아내고 강력한 왕국을 건설한 구스타프 1세 바사왕 부부의 무덤이 있다. 원래 바사왕은 스톡홀름에 묻히려고 했는데, 그가 죽을 때까지 새로운 왕도인 스톡홀름은 채 완공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의 권위에 걸맞는 장소를 선택해 웁살라 대성당에 묻힌 것이다.
또 하나의 무덤은 ‘식물 분류법’을 만든 세계적인 식물학자 카를 린네의 무덤이다. 성당 안 뒤쪽에 있는 린네의 무덤에는 언제나 꽃이 가득하다고 한다. 린네의 의미가 무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스웨덴 국민, 특히 웁살라 시민들에게 린네는 역사 속의 인물 이상의 특별함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의 린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은 웁살라 대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린네 박물관과 공원에서도 알 수 있다. 원래 1655년에 만들어진 스웨덴 최초의 식물원이었는데, 1743년부터 1778년까지 린네가 재건해 이곳에서 식물 연구를 했다. 1937년에 와서 린네의 업적을 기리는 뜻으로 현재의 박물관과 공원으로 조성됐다. 이곳에는 1300여종의 식물이 린네의 분류법에 따라 전시돼 있다. 그러나 박물관의 의미보다는 웁살라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휴식 공간이고, 산책 즐겨찾기로 더 각광을 받고 있다.
대성당 바로 앞에 있는 구스타비아눔(Gustavianum)은 1622년 가장 강력한 스웨덴 왕으로 통하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왕이 설립한 것으로, 웁살라가 얼마나 학구적인 도시인지를 보여준다. 이곳은 인체해부학 강의실이 유명한데, 수술 장면을 참관할 수 있는 현대적인 의미의 수술실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 건물은 현재 웁살라 대학교의 역사박물관이다. 건물 지붕 위의 원형 조형물이 마치 지구를 그린 듯해 인문학 보다는 자연과학의 공간이라는 인상이 짙다.
구스타비아눔에서 서쪽으로 큰 잔디밭을 지나면 1880년에 지어진 네오클래식 양식의 고풍스런 건물 하나가 나타나는데, 바로 웁살라 대학교 본관 건물이다. 1477년 50여명의 학생으로 처음 설립된 후 수 백 년 동안 북유럽 최고의 권위와 규모를 자랑하는 스웨덴 학문의 보고다.
이 대학의 설립자도 대성당을 완성한 야코프 울프손 대주교다. 1397년 덴마크가 주도해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가 결성한 칼마르 동맹국은 실상 덴마크가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지배하는 형태였다. 스웨덴의 끊임없는 독립에 대한 의지의 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 것이 웁살라 대학교다. 정치적으로 덴마크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문화와 학문적으로 덴마크로부터 독립을 취하고 있다는 자존심의 발로였다. 1523년 스웨덴이 독립을 이루고 난 후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잠시 폐쇄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지만,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왕은 대학교에 엄청난 토지를 헌납하고, 이곳에 스웨덴이 필요로 하는 인재양성을 맡겼던 것이다. 아돌프왕의 바람이 이뤄진 걸까? 20세기에 들어서서 웁살라 대학교에서는 무려 11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다.
웁살라 대학교 본관 건물에 들어서면 1층 대강당 입구 머리에 경구 하나가 적혀있다.
“자유로운 사고는 위대하다. 그러나 보다 더 위대한 것은 올바르게 사고하는 것이다.”
이 경구는 지금까지도 스웨덴의 정신과 학문, 그리고 양심의 세계를 단적으로 이야기해준다. 자유롭게 사고하되 올바르게 사고해야 한다는, 올바르다는 것 또한 주관적 판단일 수 있지만 사고의 기본으로 삼는다면 인간의 이기심에 학문이 지배당하고, 그 이기심에 사람들의 가슴이 갈갈이 찢기는 불행은 생기지 않는다는 진리가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 스웨덴 사람들은 나름의 합리성을 갖되 그 합리성에는 인간에 대한 차별이나 남의 생각을 지배하려는 아집, 그리고 남을 밟고서라도 성공해야 한다는 몰염치를 철저히 배격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500만권의 장서를 보관하고 있는 웁살라 대학교의 중앙도서관인 카롤리나 레디비바(Carolina Rediviva)에는 인문학의 위대한 흔적이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병리학자이기도 한 미셸 푸코가 1950년대 카롤리나 레디비바에서 위대한 저서인 ‘광기의 역사’를 썼다. 어느 인터뷰에서 푸코는 “웁살라의 카롤리나가 없었다면 난 ‘광기의 역사’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애기한 적이 있는데, 카롤리나 레디비바가 보유하고 있는 방대한 양의 고대에서 중세까지의 인문학과 정신병리학에 대한 자료를 이야기 한 것이다. 영국의 대영박물관 도서관이 칼 맑스의 ‘자본론’의 산실이라면, 카롤리나 레디비바는 푸코의 ‘광기의 역사’의 산실인 셈이다.
웁살라의 가장 높은 곳에는 웁살라성(Uppsala Slottet)이 있다. 1550년 경 구스타프 1세 바사왕이 건설한 스티르비스콥 요새는 웁살라 시내를 내려다보며 지금도 이 도시가 안전한 지를 늘 지켜보는 듯하다. 하지만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웁살라 시내를 내려다보며 지친 몸을 쉬게 한다. 늘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과 신선한 햇살은, 웁살라라는 아주 작은 도시를 여행하면서 온몸에 스며든 정체불명의 편안함에 휴식이라는 행복을 더 해준다.
그런데 이 웁살라성이 1년 중 가장 요란해질 때가 있다. 4월 30일이다. 이날은 하지 축제와 더불어 스웨덴 국민들이 가장 열광하는 날인 발보리(Valborg). 북위 60도 이북에 위치한 스웨덴은 긴 겨울의 왕국. 그래서 그 겨울이 끝나는 날인 4월 30일이 되면 스웨덴 국민들은 24시간동안 쉬지 않고 독한 술을 마시면서 마음껏 취한다. 특히 웁살라 대학교의 학생들은 웁살라성에 있는 거닐라 종(Gunilla Bell)을 치면서 발보리를 알리고 축하한다. 이 종이 요란하게 울리면 학생들과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온다. 스웨덴 정부가 독점으로 운영하는 독주 전문 주류상점인 ‘시스템블락’은 술을 사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그리고 웁살라 시내는 그야말로 ‘광란의 축제장’이 되는 것이다.
웁살라를 가로질러 흐르는 퓌리스(Fyris) 강은, 강이라고 하기에도 계면쩍을 정도로 작아 개울처럼 보이지만 웁살라 시민들에게는 편안한 휴식의 공간이고, 삶의 원천이다. 퓌리스 강변에 길게 늘어선 노천카페와 레스토랑은 아름답다. 가게 자체도 아름답지만 마치 전세계 인종 전시장처럼 다양한 웁살라 대학교의 학생들의 자유롭고 활기찬 모습으로 더 아름답다. 스웨덴이 외국이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거의 없다는 것은 어지간하면 다 아는 얘기인데, 특히 강의의 대부분이 영어로 진행되는 웁살라 대학교에는 스웨덴 내국인보다도 훨씬 많은 외국인들이 유학생으로 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전세계적인 정서는 퓌리스 강을 중심으로 웁살라의 전체 공기를 구성한다.
자유롭게 사고하는 것을 위대하게 생각하면서도 올바르게 사고하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웁살라.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완벽한 자유를 누리는 국민이면서도 그 자유가 올바르지 않다면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백인이 아닌 흑인이거나 또는 황인종이거나, 유럽 사람이 아닌 아시아인이거나 아프리카인, 그리고 아랍인과 아메리카인이라도 자유로운 사고를 위해, 그리고 그 자유로움을 더욱 위대하게 만드는 올바른 정의를 위해 함께 숨쉬고, 함께 공부하고, 또 그렇게 함께 즐기고 있는 것이다.
글 이석원 여행작가 /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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