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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건 후임 강경파 김영철, 갑자기 이름 바꾼 이유가...


입력 2016.01.23 07:44 수정 2016.01.23 07:54        목용재 기자

탈북자 "인민군 정찰국 7부장출신 대남정보 분석전문가"

"본명은 김동수, 김일성이 이름 바꾸라 교시 김영철로"

지난해 말 교통사고로 급사한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의 후임으로 김영철 군 정찰총국장이 임명됐다는 설이 제기됐다. 사진은 사망한 김양건 통전부장(왼쪽)과 후임설이 제기된 김영철 정찰총국장.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사망한 김양건 노동당 비서가 담당했던 통전부장의 후임으로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낙점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김영철 과거 경력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김양건이 사망한 시점에서 김영철만큼 대남문제에 잔뼈가 굵은 전문가는 없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김영철은 국내에서 '천안함 폭침', '목함지뢰 도발' 등의 대남 도발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정전협정 백지화"와 "핵타격 불바다" 등 강경하고 도발적인 발언을 내뱉은 대남 '강경파'로 유명하지만 대남관계를 분석·평가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는 부서에 오랫동안 몸을 담았던 인물로 알려졌다.

21일 조선인민군 상좌(중령~대령) 출신으로 탈북 전 정찰총국(당시 총참모부 정찰국)과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에서 근무했던 탈북자에 따르면 김영철은 1980년대 말부터 인민군 총참모부 정찰국 7부장을 담당하면서 한국과 미국, 일본 등의 정치·군사·사회와 관련된 정보 상황을 종합분석 및 평가해 대응방안을 제안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김영철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89년 2월부터 1990년 7월까지 있었던 제1~8차 남북고위당국자회담 예비접촉에 북측대표로 나가면서부터였다. 당시 예비접촉 북측 대표로 김영철이 발탁된 것은 대남정세에 대한 분석과 평가 등에 능했고 언변과 임기응변에 뛰어났기 때문이라는 증언이다.

상좌출신의 탈북자는 '데일리안'에 "김영철이 7부장하던 시절 장성우가 정찰국장이었는데 김영철이 머리가 총명하고 정세에 밝으니까 비서처럼 데리고 다녔다"면서 "특히 북한의 중앙당, 군, 행정인력 등의 간부들을 대상으로 여는 강연에서 김영철이 한국의 정치와 군사 정세에 대해 강연을 했다. 당시 워낙 웅변력이 좋아서 회담 예비접촉 대표로 발탁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 탈북자는 "장성택의 친형인 장성우의 사람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입지가 흔들릴 것으로 보고 있었는데 정찰총국장을 오랜 기간동안 맡아오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입지를 굳힌 상태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영철은 예비접촉 이후에도 1990년 9월부터 1992년 9월까지 열렸던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연형묵 당시 북한 총리와 함께 회담 성원으로 참석했다. 당시 회담에서 김영철의 활약상에 대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흡족해했다고 한다.

이후 김영철은 1992년 3월부터 같은 해 8월까지 이어진 남북고위급회담 군사분과위원회 북측 위원장으로 대남회담에 참여했고 남북정상회담 의전경호 실무자접촉 수석대표, 제3~7차 남북장성급 군사회담 북측대표, 2007년 11월 진행된 제2차 남북국방장관회담의 북측대표를 역임했다.

때문에 김양건이 사망한 시점에서 대남업무를 적절하게 수행할 수 있는 '대남통'은 김영철뿐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김영철의 담당업무가 회담과 전혀 관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면서 "주로 군사대화에 나섰고 공작원 파견 이런것들이 통전부 업무를 지원이었기 때문에 대남쪽 인물 가운데에서 김정은으로서는 김영철이 제일 편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광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김영철이 통전부장 임명이 확실하다면 그동안 통일전략을 구사하고 집행했던 부서 책임자로서 그 연장선상에서 대남정책이 전개될 것"이라면서 "김영철이라는 인물의 성향이나 전직 업무능력, 노하우를 발휘해서 그것을 적극 펼치라는 차원으로 인사를 내린 것으로 본다"고 분석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김영철의 본명이 '김동수'였다는 설도 나온다. 1990년 9월 열렸던 남북고위급회담이후 김일성이 현재의 이름 사용을 권유했다는 것이다.

상좌출신의 탈북자는 본보에 "'김영철'이라는 가명으로 회담에 참석했는데 당시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김일성은 '나도 빨치산 때 이름 두세개 가지고 활동 했었는데 김영철이라는 이름이 더 좋다'고 했다고 한다"면서 "이후 김일성 교시가 떨어졌고 모든 문건에서 김동수가 사라지고 김영철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고 전했다.

목용재 기자 (morkka@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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