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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테러', '암살'…대한민국 뒤덮은 '분노의 정치'


입력 2017.03.01 06:50 수정 2017.03.02 10:02        이슬기 기자

상대 진영 향해 '테러 협박'은 기본

같은 당내에서도 '저주' 문자 공세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4주년을 맞은 25일 대한문 및 서울 광장과 대한문 앞에서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가 주최한 제14차 탄핵기각 총궐기 국민대회(왼쪽)와 광화문 광장에서 박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 자유한국당 해체, 특별검사 수사기한 연장 등을 촉구하는 제17차 촛불집회(오른쪽)가 각각 진행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아스팔트에 피가 뿌려질 것이다.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
"생긴 대로 놀고 있네 … 000 지지 안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과격 시위대의 협박성 구호가 아니다. 2017년 대한민국 제도권 정치를 뒤덮은 '분노'의 언어들이다.

최근 서울 도심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서는 '피', '테러' 등 섬뜩한 말들이 난무했다. 자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들을 비롯한 제도권 정치인들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법률대리인단 소속 변호사들이 대거로 참석한 자리에서다.

정광용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회장은 이 자리에서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등을 정면으로 겨냥해 “악마의 재판관 3명이 있다"며 "이들 때문에 탄핵이 인용되면 아스팔트에 피가 뿌려질 것이다. 어마어마한 참극을 보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테러 위협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는 이 권한대행과 강일원 탄핵심판 주심을 향해 "헌정 전체를 탄핵하려 한다”며 “당신들의 안위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막말을 내던졌다. 또한 박 대통령 법률대리인단 소속 김평우 변호사는 "조선시대도 아닌데 헌재 결정에 복종하라면 무조건 복종해야 하느냐"고도 했다.

의회민주주의를 완전히 무시한 발언도 쏟아졌다. 김진태 한국당 의원은 단상에 올라 "탄핵소추는 처음부터 국회에서 엉터리로 해서 올린 것이니 각하되면 그만"이라며 "내가 특검 기간 연장법을 법사위에서 막고, 본회의장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저지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문수 전 경기지사도 "죄 없는 대통령을 끌어내리려 하는 특검을 탄핵해야한다"고 동조했다.

이에 앞서 법조계와 야당 인사들에 대한 공개적인 살해 공모 움직임이 포착돼 논란이 되기도 했다. 최근 보수 진영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이 권한대행 등에 대한 테러를 독려하며 참석자를 모집하는 글이 게재됐다.

실제 한 포털 사이트에는 "암살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다"라는 글이 게재됐고, 문 전 대표를 비롯한 야당 인사들을 지칭하며 "유관순, 안중근, 윤봉길처럼 사즉생의 각오로 좌초될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하고자 하는 애국열사를 모십니다"는 문자메시지 화면도 떠돌았다. 이름도 ‘청년암살단’으로 명명했다. 여기에 이 권한대행과 강 주심 헌법재판관에 대한 살해 공모 글도 버젓이 퍼지고 있다.

최근 광화문 인근에서 열린 보수 단체의 태극기 집회현장에서는 세월호 노란 리본을 단 시민이 '욕설 테러'를 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30대 직장인 이모 씨는 '데일리안'과의 인터뷰에서 "소규모 집회였고 길옆을 지나가는데, 누가 '빨갱이 새끼다'라고 소리 쳤다"며 "사람이 적으니 망정이지 맞아죽을 수도 있겠다 싶더라. 뒤통수에 대고 '나라 팔아먹는 개xx'는 물론, 부모님 욕도 거침없이 하더라"고 말했다.

“나와 다르면 모두 적” 지지자 간에도 칼 겨누는 야권

야당도 다를 바가 없다. 가장 먼저 논란이 된 건 지지율 1위 대선 후보인 문 전 대표다. 그는 지난해 12월 한 언론 인터뷰에서 ‘헌법재판소가 탄핵 기각을 결정하면 어떻게 하느냐’라는 질문에 “그런 결정을 내린다면 다음은 ‘혁명’밖에 없다”고 말했다. 앞서 SNS에는 “박근혜 정부가 양승태 대법원장과 사법부를 불법 사찰한 정황이 드러났다. 이는 헌법 쿠데타”라고도 했다.

논란이 일자 친문(친 문재인)계와 지지자 그룹에선 ‘혁명’이나 ‘쿠데타’의 의미가 확대 해석됐다고 반박했지만, 제1야당 전직 대표이자 대선 후보로 나선 제도권 정치인이 공식 석상에서 입에 담기엔 부적절한 표현이라는 지적이 쏟아졌다. 특히 보수 진영은 물론 야권 일각에서도 이러한 비판이 계속됐고, 결국 문 전 대표는 지난 25일 언론인터뷰에서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기각하더라도 정치인들은 승복을 해야 한다"고 입장을 수정했다.

더 큰 문제는 내부에서 터졌다. 문 전 대표 지지자 일부가 당내 비문계 의원들에게 조직적으로 ‘문자폭탄’ 공세를 또다시 펼친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민주당 ‘경제민주화와 제왕적 대통령제 극복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 소속 의원들의 경우, 지난 주말부터 욕설과 막말이 담긴 문자를 수십 통씩 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앞서 지난 23일부터 이틀 간 개헌 워크숍을 열어 문 전 대표 등 지도부가 개헌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지적했고, 이에 대해 문 전 대표는 “정치인끼리 개헌을 논의하는 것은 오만한 태도”라며 선을 그은 바 있다. 그간 문 전 대표는 ‘대선 전 개헌’에는 반대 의사를 표하며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를 함께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피해 의원들에 따르면, 해당 문자에는 정치적 반론을 넘어 인신공격성 발언이 다수 포함됐다. 여성 의원에게 사진을 보낸 뒤 ‘생긴 대로 놀고 있네’라고 공격하거나, ‘반문(반 문재인)질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사실상 협박을 가하는 문자도 받았다고 한다. 또다른 의원은 ‘왜 문재인을 돕지 않느냐’라는 식의 문자도 여러 차례 받았다. 일부 의원은 고발까지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자 폭탄’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달 박원순 서울시장과 김부겸 의원이 ‘촛불공동경선’ 등 문 전 대표와 다른 주장을 펼치자, 욕설과 협박이 담긴 문자가 하루에도 수백 통씩 날아왔다고 한다. 당시 김 의원은 “핸드폰이 울리기만 해도 무섭다”며 호소했지만, 의정활동이 불가능한 수준에 다다르자 주변에 양해를 구하고 아예 전화번호를 바꾸기도 했다.

당초 문 전 대표는 “정치인이라면 비판적 문자도 받을 줄 알아야 한다”며 “당원으로서 의사표시 하는 것을 특정인을 위해서라는 식으로 폄하해선 안 된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동일한 문제가 재발하고 당내에서도 문 전 대표가 나서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28일에는 “자제해달라. 우리는 한 팀”이라고 호소했다. 캠프 차원에서도 성명을 내고 “상대방에 대한 욕설과 비방, 인신공격, 위협으로 번지는 것은 지지하는 후보는 물론, 당에도 결코 도움이 안 된다”고 밝혔다.

이렇듯 여야를 막론한 ‘분노와 증오의 정치’가 계속되면서, 정치권 내부에서도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론 분열의 1차 원인과 책임은 결국 정치인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중진인 원혜영 의원은 “법적 절차에 따라 국회가 탄핵을 결정했고 지금 심판이 진행 중인 이상, 당연히 그 결과에 승복해야한다”며 “기각이나 인용이 되면 아스팔트에 피가 뿌려질거라든가 승복하지 못한다든가 이런 식의 위기의식을 조장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당내 분열에 대해서도 정치인들과 유권자 모두의 의식 변화를 촉구했다. 그는 "근본적인 견해의 차이도 아닌 작은 차이를 가지고 지나치게 크게 받아들이거나 악의적으로 해석해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어떤 경우든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상대방을 존중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할 때”라고 덧붙였다.

김명연 한국당 의원도 “정치의 기본 책무는 법과 질서를 지키고 국민들이 국가의 시스템을 잘 지키도록 먼저 솔선수범 하는 것”이라며 “여야를 막론하고 일부 인사들이 법과 질서를 부정하는 행위를 앞서서 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나와 뜻이 달라도 제도에 수긍하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지지 집단에서 튀려고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과격한 말과 행동을 지양해야한다”고 말했다.

이슬기 기자 (wisdom@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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