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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인터뷰] 김해숙 "44년 연기 생활 중 가장 고통스러웠죠"


입력 2018.06.14 09:06 수정 2018.06.15 10:06        부수정 기자

영화 '허스토리' 위안부 피해자 배정길 역

"배우로서, 한 인간으로 많이 배운 작품"

영화 '허스토리'에 출연한 배우 김해숙은 "위안부 문제는 현재진행형 아픔"이라고 강조했다.ⓒ뉴

영화 '허스토리' 위안부 피해자 배정길 역
"배우로서, 한 인간으로 많이 배운 작품"


배우 김해숙(62)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다룬 영화 '허스토리'(감독 민규동)를 찍고 우울증에 시달렸다. 영화 촬영 내내 슬픔과 울음을 꾹꾹 삼킨 탓이다. 44년 배우 생활 동안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베테랑 배우 김해숙을 힘들게 한 '허스토리'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벌인 수많은 법정투쟁 가운데 유일하게 일부 승소를 받아낸 판결인 '관부 재판'의 실화를 소재로 한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 동안 23회에 걸쳐 일본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힘겨운 법정투쟁을 벌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10명의 원고단과 이들의 승소를 위해 함께 싸웠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관부 재판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재판 사상 처음으로 보상 판결을 받아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이룬 재판이지만, 지금껏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영화는 일본 정부에 맞서 재판을 이끈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배정길 역을 맡은 김해숙을 12일 서울 팔판동에서 만났다. 그는 "처음 시나리오를 받고 내가 이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며 "피하고 싶을 정도로 무서웠다"고 털어놨다.

'허스토리'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현재를 다뤘다. 과거는 나오지 않는다. 이 점에 이끌린 김해숙은 영화를 용기 있는 여성들의 법정 드라마라고 해석했다. 겁 없이 뛰어든 영화는 고통스러웠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연기한다는 사실에 저절로 고개가 숙어졌고, 배우로서 부끄럽기도 했다.

"실화를 연기한다는 게 정말 부담스러웠죠. 그분들에게 '누를 끼치지 말자'를 목표로 삼고 연기했어요. 나 자신을 버리고 배정길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했죠. 한 인간으로서 겪을 수 없는 일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는 게 참 고통스러웠어요."

영화 '허스토리'에 출연한 배우 김해숙은 "모든 장면을 찍을 때 고통스럽고 슬펐다"고 했다.ⓒ뉴

1974년 MBC 7기 공채 탤런트 출신인 김해숙은 '흐르는 강물처럼'(2002), '장밋빛 인생'(2005), '소문난 칠공주'(2006), '해바라기'(2006), '박쥐'(2009).' 친정엄마'(2010), '무자식 상팔자'(2012), '도둑들'(2012), '왕가네 식구들'(2013), '그래, 그런거야'(2016), '아가씨'(2016), '아버지가 이상해'(2017), '희생부활자'(2017), '이판사판'(2017)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하며 '열일'하는 배우다.

여러 작품을 했지만 '허스토리'처럼 답이 안 나온 작품은 처음이었다. 극 중 배정길은 말이 별로 없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낮고 갈라진 목소리는 아픈 세월을 짐작하게 한다. "배정길은 온갖 인생의 고통을 겪은 사람인데. 이런 아픔을 겪은 사람이라면 사소한 일에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어요. 말수도 적고. 그분들이 겪은 트라우마 장면이 잠깐 나오는데 정말 가늠할 수 없는 아픔이지요."

이번 작품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는 일이었다. 모든 장면이 슬펐다. 슬픈 감정을 다스리게 한 건 민규동 감독이었다. 민 감독은 억지로 눈물을 강요하지 말자고 했다. 눈물을 꾹 참은 그는 장면이 끝날 때마다 눈물을 터뜨렸다. 가슴 한쪽이 뻐근해졌다. 마음이 아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가장 신경 쓴 장면은 재판 장면이다. 예수정, 문숙, 이용녀 등에 이어 네 번째로 재판 장면을 찍은 김해숙은 촬영 전날 앓아눕기까지 했다. 촬영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할머니들을 행각해 힘을 냈다. 재판 장면을 찍은 날은 배우들이 탈진하기까지 했다. 피해자들의 아픔을 생각하며 다들 뜨거운 열정을 촬영에 임했다.

배정길은 재판장에서 증언하며 피를 토하듯 아픔을 뱉어낸다. "그 여자의 모든 과거가 터져 나와요. 대사 하나하나가 소중했죠. 슬픔, 분노, 아픔 등을 완벽하게 연기하고 싶었는데 부족했어요."

배우들과는 동지애로 똘똘 뭉쳤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재판신을 찍었다. 배우는 "이렇게 고통스러운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재판신을 찍을 때는 감정이 깨질까 봐 서로 배려했다"고 말했다.

영화엔 위안부 피해자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담겼다.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김해숙은 이번 영화를 통해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 "타인의 아픔을 내 일 같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동안 내 방식대로 해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도 자기 일처럼 봐주셨으면 해요. 이 영화가 그분들에게 위로와 위안이 됐으면 합니다. 저 역시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많은 걸 얻었거든요."

영화 '허스토리'에 출연한 배우 김해숙은 "울음 참는 게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털어놨다.ⓒ뉴

영화 촬영 내내 모든 게 슬펐다는 그는 끝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도 슬펐다. 이대로 가면 심각하겠다 싶어 다른 작품을 택했다. 작품이 끝나고 나니 또 슬퍼졌다. 이후 여행을 갔다 온 뒤 나아졌다. "정말 처절하게 연기했는데 여전히 부족해요.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죠. 근데 너무 힘들어서 두 번은 못 할 것 같습니다."

'국민 엄마'인 그는 이번에도 엄마로 분했다. 아들을 위해 과거를 숨기고, 또 재판에 참여한다. 그는 "국민 엄마 타이틀은 들어도, 또 들어도 좋다"고 미소 지었다.

과거에 비해 작품 속 엄마 캐릭터는 꽤 바뀌었다. 예전엔 자식과 가족들을 위해 무조건적인 희생을 하는 엄마가 주가 됐지만, 이젠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사는 엄마가 자주 등장한다.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들이 많아지면서 세상도 변했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건 모정이다.

배우는 "엄마의 사랑만큼은 변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나도 일을 하다 보니 나 자신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며 "이번 영화를 통해 여성들이 어떻게 용기를 내고, 싸우는지 간접적으로 체험했다"고 했다.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마을 묻자 "나도 관부재판을 몰랐는데, 관객들이 영화를 통해 알았으면 한다"며 "위안부 문제는 과거의 아픔이지만 현재 진행형이다. 끝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얻어가셨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열일'하는 그가 또 하고 싶은 캐릭터가 있을까. "메릴 스트립 보면 다양한 역할을 하잖아요. 저도 할 수 있을 때 다양한 역할에 도전하고 싶어요."

평소엔 맛집을 찾아다니는 게 낙이다. "제가 식탐이 좀 있어요. 먹을 때가 제일 행복해. 저랑 같이 다니면 살이 안 빠져요. 호호."

부수정 기자 (sjboo71@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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