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린 퍼스,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맡아 묵직한 연기
스칼렛 요한슨, 하녀에서 뮤즈로 변화하는 그리트 열연
피터 웨버 감독, 명작 탄생과정 영화적 상상력으로 펼쳐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17세기 걸작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있고 뜨거운 사랑을 받는 명화다. 고개를 돌려 보는 이와 눈을 맞추는 듯한 자세와 오묘한 표정, 약간 벌어진 입가와 커다란 눈망울에 맺힌 ‘해맑은 웃음’을 마주하노라면 근심이 물러가고 아늑한 미소가 함께 지어진다.
보는 이에게 힐링을 전하는 소녀가 누군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어린 소녀가 커다란 귀걸이를 한 점, 그것도 수수한 옷차림의 그녀가 고가의 진주 귀걸이를 한 것도 이색적이지만 소녀의 얼굴 표현에 속눈썹이 보이지 않고 주근깨도 없고, 머리칼이 한 올도 드러나지 않은 등 신체특징이 나타나지 않아 ‘실존하지 않는 허구의 존재’라는 주장도 미술계에 있어 온 게 사실이다.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2003, 감독 피터 웨버, 수입·배급 영화사진진)는 동명의 그림을 그린 네덜란드 황금기의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를 전면에 내세워 이 그림의 탄생과정, 소녀의 정체에 대해 설득력 있는 영화적 상상력을 펼친다.
페르메이르 역은 콜린 퍼스에게 맡겨졌는데 화가로서의 예술적 고뇌와 가장으로서의 부담 사이에서 힘겨워하는 모습, 그러함에도 꺾을 수 없는 예술혼과 아티스트로서의 다양한 시도를 무게감 있게 표현했다. 대사가 많지 않아도 눈빛과 표정으로 더 깊이 있게 말하고, 세상의 주변을 맴도는 먼 거리 모습에서는 콜린 퍼스가 아닌 장차 거장으로 평가받을 줄 모르는 ‘어떤’ 화가가 보일 뿐이다.
페르메이르가 얹혀사는 장모 집에 임시로 고용된 하녀 그리트 역은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했다. 평민의 딸로 가세가 기울어 하녀 일을 하게 되는데 이 집안의 가장 까다로운 일이자 모두가 꺼리는 화실 청소가 그녀에게 맡겨진다. 호기심 많고 영민한 그리트는 그저 청소만 하지 않는다. 감히 부인도 못 보는 그림을 감상하고, 빛의 양이 그림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며 먼지 쌓인 유리창을 닦고, 그림 속 여성이 갇힌 듯한 느낌에서 벗어나도록 과감히 의자를 치운다. 이러한 그리트를 멀찌감치에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페르메이르다.
페르메이르는 그리트를 마치 조수처럼 대한다. 실제로 영국의 흙과 아프리카의 돌, 소 오줌과 선인장 벌레 등 각종 시료에 도전했던 페르메이르는 영화 속에서 그리트에게 돌을 갈게하고 여러 물감 재료를 준비하게 한다. 그리고 모델이 되어 줄 것을 권한다. 이미 페르메이르의 마음에 뮤즈로 자리 잡은 그리트가 모델이 되는 건 당연한 일. 새벽부터 밤까지 쫓기는 집안일, 화실에 오래 머무르는 것에 대한 부인의 경계 속에 모델을 거부하던 그리트는 마침내 캔버스 뒤에 서게 되는데. 그 그림이 바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이다.
영화가 펼쳐낸 명작의 탄생과정은 이렇다. 실제로 페르메이르는 주로 상인계층의 일상을 그렸는데, 영화에서는 다둥이 부모인 딸과 사위의 생계를 챙기고 자신의 풍요를 추구했던 페르메이르의 장모가 뛰어난 수완으로 거부 상인의 후원을 받아 사위가 그들 가족을 화폭에 담도록 종용한다. 그림이 끝나기 무섭게 상인 반 라이벤과의 새 그림 계약을 시도하는 장모, 그릴 만큼 그려 시큰둥해진 재력가. 노회한 부자의 눈에 어여쁜 그리트가 들어오고, 하녀들이 자신을 시중드는 그림을 요구한다. 자신의 뮤즈를 탐욕가의 질펀한 손끝에 둘 수 없었던 페르메이르는 그리트를 시중 그림에서 별도로 떼어내 단독 인물화로 그려 라이벤에게 주기로 한다. 그리트를 아끼는 페르메이르에게도 그녀를 벽에 걸고 매일 볼 수 있는 라이벤에게도 좋은 일이지만, 돈이 우선인 장모는 모른 척 넘기고픈 일이지만, 그리트의 미모가 불안해 경계의 눈빛을 거두지 않는 부인에게는 경천동지할 일이다.
그리하여 비밀리에 그리트의 인물화가 그려지는데. 어찌하여 귀족도 부자도 아닌 수수한 옷차림의 소녀가 독사진과도 같은 그림의 주인공이 되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명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 이마를 두른 아름다운 푸른 수건과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과도 같은 흰 수건만 보일 뿐 머리칼이 가려진 사연에 대해선 영화를 통해 직접 확인하기를 바란다. 단순하게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그림들에서 확인되듯 하녀들의 머리엔 흰 두건이 씌워져 있고 그리트가 하녀이니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서 머리칼은 중요한 모티프이고, 머리칼이 드러난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인지 피터 웨버 감독은 새롭게 포착해 낸다.
피터 웨버 감독이 연출에 힘을 준 또 하나는 ‘걸작이 탄생한 방’이다. 주인과 하녀가 화가와 뮤즈로 만나는 방. 페르메이르와 그리트는 결코 선을 넘지 않지만, 손가락 하나 닿는 것조차 얼마나 짜릿한 전율의 순간인지 생생하다. 그리고 그림 안에서 그림을 환히 비추는 ‘진주 귀걸이’가 그리트의 귀에 걸리게 되는 과정 또한 흥미진진한데. 페르메이르가 그리트의 귓불에 구멍을 내는 장면, 그 순간의 스칼렛 요한슨 연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하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그림의 주인공이자 영화의 주연인 스칼렛 요한슨은 다양한 장르에서 몸을 아끼지 않은 호연을 해 왔건만 주로 섹시 심벌로 기억되는 게 안타까운 배우다. 이번 영화에서도 초승달 같은 눈썹에 거칠어진 손으로 그리트 역에 매진했다. 이마에 푸른 두건을 두르고 그림에서처럼 갈색 상의를 입고 고개를 돌릴 때, 순간 그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이질감 없이 겹쳐진다. 원작 속 소녀에게서 번지는 해맑음은 없지만 충분히 명화와 닮아 있고 스칼렛 요한슨의 색깔이 입혀진 장면으로, 영화가 아닌 ‘그림’으로 보인다. 아, 원래 그림은 어땠더라? 명화를 검색하는 나를 발견할지 모른다. 반 라이벤을 연기한 톰 윌킨슨, 그리트를 사랑하는 푸줏간 집 아들 피터를 연기한 킬리안 머피도 우리를 17세기로 데려가는 데 한몫한다.
지난 4월말 네덜란드 마우리츠하이스미술관은 엑스레이와 디지털 현미경, 페인트 샘플 분석 등으로 1665년 그려진 그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정밀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놀라운 사실이 몇 가지 밝혀졌는데 없는 줄 알았던 속눈썹이 실제론 그려져 있었고, 검은 배경으로 보였으나 녹색 커튼이 오른쪽 상부에 있었다. 아직은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밀 분석 덕에 조금은 우리와 더 가까워졌다.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다면, 바로크풍의 유채화 명작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조금 더 가까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