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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메모리즈㉗] 투탕카멘과 영화 ‘사도’


입력 2021.05.01 14:32 수정 2021.05.01 11:29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전시회 포스터 ⓒ

1997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투탕카멘의 황금가면을 처음 봤다. 창립 10주년을 맞은 예술의전당이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고대문명의 발상지를 찾아서’ 기획전을 준비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이집트전’이었다. 금빛 찬란한 유물에 눈이 황홀했고, (투탕카멘의 재위 BC 1361∼BC 1352 기간에 비춰볼 때) 3000년 이상 전에 예술적으로만이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이토록 고도화된 문명이 있었다는 것에 경탄했다. 언젠가는 직접 가서 이집트를 보리라, 스핑크스의 실물을 보리라 다짐이 샘솟는 전시였다.


22년이 지나 현실이 됐다. 불과 2년 전인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힘들어선지 오래전 꾼 꿈만 같다. 아이에게 성인이 되면 친구와도 좋고 혼자서라도 꼭 가보라고 권했을 만큼 압도감을 주는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도굴을 피하고 어려워진 재정에 맞춰 지상에서 지하로 옮겨간 왕들의 무덤 ‘왕가의 계곡’, 프랑스 루브르나 영국 대영박물관에 비해 전시나 보관에 들인 자본이 덜해서 이 귀한 것들을 이렇게 툭툭 세워놓아도 되나 놀랐지만 남의 것 아닌 원래 있었던 곳에 존재하는 원본이 주는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수도 카이로의 국립박물관이 잊히지 않는다.


시간과 경비의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언제든 다시 가고 싶은 곳, 아이는 성인이 됐지만 코로나19로 갈 수 없는 이집트가 한국에 온다는 소식에 눈이 번쩍 뜨인다.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를 비롯해 1300여 점의 유물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특별전시실에서 오는 6월 22일부터 만날 수 있다. 이집트 정부의 지원 아래, 이집트 학자와 고대의 이집트 기법을 복원한 장인, 과학자, 무대예술가, 다큐멘터리 감독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해 투탕카멘의 무덤과 유물을 발굴 당시 상태로, 실물 크기 그대로 재현했다고 한다.


아마도 4겹의 목관실을 지나 다섯 번째 석관실, 마치 5겹의 상자가 포개진 형태로 조성된 ‘현실’(전실, 별실, 왕의 무덤이 있는 현실, 보물실로 구성된 투탕카멘 무덤의 구조 중)의 모습을 재현하지 않았을까. 석관실 안에 놓인 3겹의 관, 파라오의 전신 모양을 한 금을 입힌 목관 2겹 속 마지막 순금의 관, 그 안에 영면해 있던 투탕카멘의 미라, 미라의 머리부터 어깨 부분을 앞면 얼굴부터 뒷면 머리카락까지 온전히 감싼 입체적 황금마스크까지 그대로 볼 수 있으리라. 코로나19로 관광객이 급격히 줄어든 상황에서 직접 월드투어에 나선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미 스위스 취리히, 독일 뮌헨, 스페인 마드리드, 프랑스 파리, 미국 뉴욕을 거쳐 우리나라에 왔다.


세계 각지에서 진행된 전시 ⓒ이상 디커뮤니케이션 제공

사실 이집트에 가도 투탕카멘의 흔적을 보는 게 쉬운 여정은 아니다. 무덤의 모습은 왕가의 계곡에 가서도 다시 80유로(약 10만원)의 추가 비용을 가이드에게 내고야 볼 수 있었다. 책에서나 보던 벽화, 세 번의 밀레니엄이 지나는 동안 그 자리를 지킨 그림을 맨눈으로 보는 건 너무나 경이롭다. 동시에 ‘이것이 파라오의 무덤인가?’ 예상보다 작은 규모에 놀라고, 내장품은 카이로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음에 맥이 빠지는 관람이기도 하다. 국립박물관에 가도 2층 한 켠에 위치한 투탕카멘의 황금실은 박물관 입장료만큼을 다시 내야 입장이 가능하고 사진 촬영은 금지돼 있다.


그러함에도 투탕카멘을 만난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단순히 11kg의 금으로 만들어진 예상보다 큰 크기, 파라오 투탕카멘의 이목구비부터 머리카락과 장신구까지 너무나 정교한 모습 때문은 아니다. 마치 살아있는 이의 표정과도 같은, 마음이 담긴 듯한 눈빛이 인상적이다. 어딘가 애수가 느껴지는 눈빛, 아홉 살에 왕이 되어 18세에 생을 마감한 삶을 투영한 선입견 때문일까.


투탕카멘의 아버지 아크나톤은 다신교에서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삼는 일종의 종교개혁을 하다 실패한 인물이다. 투탕카멘은 아크나톤의 둘째 아들로, 형인 스맨크카레 왕을 이어 제18왕조 12대 왕이 되었다. 투트 앙크 아멘, 살아있는 아멘(태양신)의 형상이라는 뜻의 투탕카멘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는데, 제사장들의 권력 확장을 경계한 아버지의 개혁 실패로 주변에는 정적이 많았고 아버지의 정비였던 네페르티티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어린 나이에 사망한 데다 왕위를 이어받은 게 대신관 아이였던 탓인지 암살설이 오래도록 횡행했다. 머리에서 부서진 뼛조각이 발견되고 다리가 부러져 암살설은 힘을 얻었다. 현시점에서는 다르다. 친남매 간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선천적으로 면역력이 약하고 왼쪽 발목이 안으로 휘는 내반족이었고,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얘기되는 게 일반적이다.


암살설이 사그라들고도 비운의 파라오로 여겨지는 데에는 배경이 있다. 제19왕조를 연 람세스 1세의 아들, 세티 1세는 신전 벽에 이집트 왕 66명의 아비도스 왕명록을 새겼는데 여기에 투탕카멘의 이름이 없다. 다시 아문-라 신앙으로 돌아간 뒤 작성된 왕명록에는 아톤 신앙을 주창한 아크나톤의 이름도, 형 스맨크카레의 이름도, 파라오가 된 대신관 아이의 이름도 없다. 잊힌 파라오가 된 것이다.


이러한 불행이 역설적으로 현시대 우리에게는 이집트문명의 맛을 보게 하는 행운이 됐다. 18세에 갑자기 사망해 다른 파라오들에 비해 무덤 규모도 작고, 입구도 대문으로 세워져 있는 게 아니라 마치 지하실 들어가는 문처럼 바닥에 있다. 미처 무덤을 준비 못 했던 시기라 다른 왕비의 몫으로 마련된 곳에 안장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덕분에 도굴꾼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유명 파라오의 피라미드와 무덤들은 대부분 도굴당한 데다 모습 그대로 암거래된 게 아니고 금을 녹여 판매된 경우가 많아 흔적을 찾기 어렵고, 존재감 없던 소년왕은 현세에는 가장 유명한 파라오가 되고 우리가 보는 이집트 유물의 상당 부분이 그의 것이 되는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영화 '사도' 스틸컷 ⓒ㈜쇼박스 제공

‘왕가의 계곡’ 투탕카멘의 텅 빈 무덤 안에서 불현듯 스물일곱에 요절한 사도세자, 영화 ‘사도’(감독 이준익, 제작 타이커픽처스, 배급 ㈜쇼박스)가 떠올랐다. 차남인 것도, 후궁의 아들인 것도 같고, 요절한 것도 같다. 세밀한 배경은 다르다 해도 권력이라는 욕망이 빚은 참사로 사도는 죽었고, 투탕카멘은 왕명록에서 지워졌다. 살아서보다 죽어서의 지명도가 높은 것도 같다. 이선은 죽어 아버지 영조로부터 ‘사도’라는 단 두 글자 시호를 받고, 이후 후손들에 의해 ‘사도장헌세자’로 시작해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륜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장헌세자’까지 길어졌다가 고종에 이르러 ‘신문환무장헌광효대왕’ 왕으로 추존되고, 대한제국 수립 후 ‘장조 의황제’라는 시호의 황제로 재 추존됐다.


영화 ‘사도’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도 나눠 가질 수 없는 권력, 나눌 수 없음에서 오는 불안과 거세의 참사를 신랄하게 조명한다. 배우 송강호는 ‘영조의 질투’를 실감 나게 연기했다. 역사는 승자를 기록하지만, 후세는 ‘아픈 손가락’에 마음을 준다. 영조의 영화라 해도 무방할 작품에 ‘사도’라는 제목이 붙어야 더욱 관심이 가고, 배우 유아인이 해낸 처절한 연기에 이선의 생애에 대한 연민을 보태 가슴이 미어진다. 연기상의 향방도 비운의 세자를 연기한 유아인에게로 향한다. 우리는 비로소 사도에 대한 뭐라 규정하기 힘든 미안함을 한 숟가락 덜어낸다.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를 향한 감탄에서도 비슷한 감정이 곁든다.


부활과 영생을 바라며 미라로 잠든 대다수 파라오의 관에 ‘죽은 자의 안녕을 방해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하지만 투탕카멘의 관에는 ‘왕의 이름을 알리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라고 적혀 있다. 이름이 지워질 운명을 알았던 것일까. 3000년 뒤 널리 이름을 알리고 모두가 아끼고 기억하는 영광을 누릴 운명을 알았던 것일까. 왕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자는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이다. 그는 꼼꼼히 유물 하나하나의 목록을 만들어가며 ‘정석대로’ 발굴을 진행했고, 유물들이 눈독을 들이는 강대국 손으로 넘어가지 않고 이집트의 것이 되도록 힘썼다. 모든 일을 마친 뒤 영국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이름이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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