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과 '불가근불가원'…정권 교체기에도 '외풍' 없어
구광모 회장 취임 후 사업구조 개편…배터리‧전장 리더십 강화
尹정부, 전기차 전환기 車산업 살리려면 LG그룹과 팀플레이 절실
5월 10일 윤석열 정부의 출범과 함께 재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 전망이다. 이전 정부에 비해 전반적인 기업 경영여건은 개선될 것으로 보이지만, 기업별로 주력 업종과 새 정부 정책기조와의 연계성, 총수의 성향 등에 따라 상황은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윤 정부 출범을 계기로 주요 대기업 집단별 기상도를 그려본다.[편집자 주]
LG그룹은 전통적으로 정권 교체기에도 별다른 외풍(外風)에 휘둘리지 않고 순탄하게 사업을 영위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4대그룹 중 유일하게 여의도에 본사를 두고 있으면서도 여의도 정치권과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를 유지하고, 공식 재계 행사 외에는 외부 활동을 자제하는 총수 일가의 조용한 가풍 덕이다.
4대 총수인 구광모 회장 역시 이런 가풍을 이어받아 취임 후 처음으로 맞는 정권 교체 시기에도 LG그룹을 순풍(順風)으로 이끌 전망이다.
LG그룹에서는 정치권이나 정부 규제기관과 엮일 빌미를 찾아보기 힘들다. 구 회장 본인을 비롯한 총수 일가가 불미스런 일에 연루됐거나 연루될 성향도 아니고, 일찌감치 국내 대기업집단 최초로 지주회사체제를 구축해 지배구조도 투명하고 탄탄하다. 사업 구조상 중대재해 발생 리스크도 상대적으로 작다.
굳이 대외적으로 ‘ESG 경영’을 천명하지 않아도 환경이나 사회, 지배구조 등 어떤 측면에서도 흠 잡을 곳이 없다. 아쉬운 게 없고 책잡힐 일이 없으면 정치권에 어떤 변화가 있건 독야청청(獨也靑靑)할 수 있다.
하지만 사업 분야에서는 정부와 합을 맞출 일이 많다. 사실 아쉬운 쪽은 새로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다. 윤 정부의 임기는 국내 주력사업 중 하나인 자동차 산업이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 전환되는 과도기에 걸쳐있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2030년을 전후로 내연기관차를 전면 퇴출시키고 완전 전동화 차량만을 허용하는 정책을 도입하고 있으며, 윤 당선인 본인도 2035년 내연기관 퇴출을 공약으로 내걸었었다.
전기차 시대에도 국내 자동차 산업이 전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여부는 윤 정부 시기에 판가름 난다. 그리고 그 열쇠는 완성차 업체가 아닌 배터리‧전장 분야에서 강점을 가진 LG그룹이 쥐고 있다.
완성차 업체가 엔진을 비롯한 대부분의 구성 요소를 만들고 비핵심 부품을 소싱을 주는 내연기관차와 달리 전기차는 성능과 상품성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인 배터리를 외부로부터 공급받는다. 자율주행과 인포테인먼트 기술이 고도화되며 제조원가에서 전장부품이 차지하는 비중도 높아지는 추세다.
즉, 앞으로의 자동차 산업은 완성차 업체가 아닌 배터리‧전장 업체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LG그룹은 구광모 회장 취임 이후 스마트폰, 태양광, 연료전지, 수처리, LCD 편광판, 전자결제 등 경쟁력이 떨어지거나 성장 전망이 불투명한 사업을 정리하는 대신 배터리와 전장사업 분야를 집중 육성하는 식으로 사업을 재편해 왔다.
LG그룹 산하 LG에너지솔루션은 국내를 넘어 글로벌 배터리 업계를 선도하는 기업이다. 시장 점유율에서는 거대한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하는 중국 CATL에 밀려 2위에 머물고 있지만 기술력 측면에서 LG에너지솔루션이 선도 업체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내 현대차그룹과 미국 제너럴모터스(GM)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잇달아 LG에너지솔루션과 손잡고 전기차 공장과 연계한 배터리 공장 설립에 나서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이 전고체배터리 등 차세대 배터리 분야에서도 경쟁력을 유지한다면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서의 K-배터리 지배력은 더욱 확대될 여지가 높다.
전장 사업부문에서는 LG전자 자동차부품솔루션(VS)사업본부(인포테인먼트), LG마그나 이파워트레인(전기차 파워트레인), ZKW(자동차 조명)의 삼각편대를 구축해 전기차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들을 모두 장악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윤석열 정부가 자동차 산업 패러다임 전환의 혼란기에도 국내 자동차 산업을 지켜내고 K-배터리의 글로벌 리더십 강화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구광모 회장이 이끄는 LG그룹과의 팀플레이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물론 LG그룹에게도 새 정부의 정책적 지원은 절실하다. 당장 시급한 문제인 글로벌 공급망 불안에 따른 니켈, 코발트, 리튬 등 배터리 원재료 수급난 해소부터, 전방 산업인 전기차 보급 확대를 위한 충전 인프라 구축, 폐 배터리 재사용‧재활용 사업 관련 제도적 뒷받침까지 윤 정부와 머리를 맞댈 분야가 산적해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배터리가 반도체에 이어 새로운 ‘산업의 쌀’로 부각되고 있는 만큼, 새 정부에서도 이 분야 리딩업체를 이끄는 구광모 회장과의 접점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