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대표 마당쇠 역할 자청하면서
문재인까지 ‘처단’ 명단에 올려
국회 소집해놓고 우르르 외유길
세계에서 국회의원직 누리기가 가장 편하고 수지맞는 나라는 어디일까? 과문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대한민국을 앞설 나라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우리나라에서 국회의원직은 정말 신나고 폼나는 직업이다. 우선 책임질 일이 없다. 아무에게나 무슨 말이든 할 수가 있다. ‘무례’는 오히려 ‘국회의원다움’으로 박수를 받는다. 게다가 보수도 아주 많다. 작년의 1인당 세비 총액+각종 지원금은 2억 4606만원이었다. 봉급생활자 최고 수준이다.
그렇다고 업무가 넘쳐나는 것도 아니다. 일을 잘못한다고 문책당할 일 또한 없다. 4년마다 실시되는 선거에서 유권자의 심판을 받기는 하지만 일 잘못하는 것 때문에 퇴장당할 위험성은 상대적으로 낮다. 유력정당 소속이라면 유권자가 아니라 당의 지배 세력의 손에 정치적 생사가 달려 있다. 이들이 ‘국민의 대표’라니!
당 대표 마당쇠 역할 자청하면서
물론 국회의원에게도 제도상으로는 다양한 책무가 있다. 입법·예산심의·국정감사 등이 중핵적 과제이지만 이외에도 국정조사·주요 공직자 임명 동의 및 해임 건의, 탄핵소추 등 할 일이 태산 같다. 그런데 정말 자신이 직접 이런 일들을 일일이 처리할까? 의원 각자가 국가공무원 신분을 가진 보좌진 8명에 인턴 1명을 거느리고 있다. 많은 경우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주인이 챙기는’ 시스템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 이런 전폭적 지원제도가 달리 있겠는가(미국의 경우는 보좌진 운영 체계가 기본적으로 다르니까 예외로 하고).
그야말로 팔자가 늘어진 신분이라 할 수 있다. 이 좋은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을 마다하겠는가. 그 결정권자가 당의 공천권자다.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당 대표일 것임은 불문가지다. ‘국민의 대표’라는 제도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당 대표의 마당쇠 노릇을 자청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 점에서 지난달 27일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에서 ‘단일대오’를 이탈한 의원이 (추정이지만) 수십 명에 이르렀다는 것은 어느 쪽에나 충격이기에 충분했다. 당연히 ‘개딸’으로 상징되는 이 대표 강성지지자들은 망연자실했을 수 있다. 그렇게 이해한다고 해도 ‘수박 색출 및 축출’ 선동은 황당하다. 이 대표와 공천 경쟁을 벌였던 이낙연 전 국무총리 제명 청원에 동의한 당원이 5일 현재 7만명에 육박했다. 이 전 총리뿐만 아니라 문재인 전 대통령까지 ‘처단’ 명단에 올린 포스터가 인터넷에 등장했다. ‘수박 국짐 첩자 7적 처단하자!’는 제목에 일곱 명의 얼굴 사진을 담았다.
‘개딸’들은 의심 가는 민주당 국회의원들에게 일일이 문자를 보내 체포동의안 표결 때 찬성투표를 했는지의 여부를 밝히라고 요구하기도 한 모양이다. 상당수 의원들이 자신은 부(否)표를 던졌다고 밝히는 답신(보고서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을 보냈다고 하는데, 이야말로 ‘웃픈’ 코미디다. 이 대표 극렬지지자들이 당의 규율부장 노릇을 하고 있다는 뜻인데, 어느새 문 전 대통령도, 이 전 총리도 축출 대상이 되고 말았다.
문재인까지 ‘처단’ 명단에 올려
분위기가 급속히 악화되는 가운데 이 대표가 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내부를 향한 공격을 중단해 달라”는 글을 오렸다. 그는 “이럴 때 가장 미소 짓고 있을 이들이 누구인지 상상해 달라”며 이 전 총리 등에 대한 압박을 만류했다. “이만큼 혼을 내줬으니 정신 차렸겠지”라는 판단이 선 것일까? 어쩌면 속으로는 자신의 당 장악력이 더 강화됐다고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추종자들이 문 전 대통령까지 ‘7적(七賊: 일곱 명의 도적)’으로 당당히 매도하는 것을 보면서….
그래서 말인데, 이른바 ‘2·27 반란자’들을 제외한 민주당 소속 의원들의 세비와 보좌진 월급, 그리고 의원실에 대한 각종 지원비를 이 대표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옳지 않을까. 국회의원에 대한 보수와 유지비용을 국비로 지급하는 것은 그에게 ‘국민 대표’의 역할과 책임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일은 이 대표를 위해서 하고, 보수는 국고에서 받는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변호사이기도 한 이 대표가 이 이치를 모를 리 없다. 국민의 피 같은 돈이다. 셈은 분명해야 한다.
자신의 신조를 부담감 없이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자유민주사회다. 이 대표를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은 무리의 힘, 문자폭탄의 힘으로 이 민주 원리에 맞서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국회의원들의 입을 집단적 위협으로 틀어막는 것보다 더 심각한 자유민주정치 위해(危害)행위가 달리 있을까? 이 대표는 이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피력할 필요가 있다.
“독립된 개인에게는 별로 힘을 얻지 못하는 반감이나 반론도 군중 속의 개인에게는 곧바로 흉포한 증오로 변한다.……군중의 수가 많아질수록 자신들이 벌을 받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강해진다. 수적으로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군중은 독립된 개인으로 있을 때는 하지 못했던 감정 표현과 행동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다” (귀스타브 르 봉, 군중심리, 강주헌 역).
국회 소집해놓고 우르르 외유길
이 대표가 자신을 옹위하고 있는 군중(광장의 군중이든 사이버 공간의 군중이든)의 성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 인식이 자신의 정치적 태도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월초의 민주당 의원 집단 외유에 대한 이 대표의 생각도 알고 싶다. 3‧1절에 기어이 임시국회를 열어야겠다고 고집한 민주당은 “민생법안 처리가 급해서”라고 주장했다. 하루라도 틈이 생기면 이 대표가 체포당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 아니라 오직 ‘민생’을 위해서라고 우겼다. 그렇게 국회를 소집한 민주당의 의원과 민주당 출신 무소속 의원 등 수십 명이 이날 전후로 우르르 집단 외유를 떠났다. 김진표 국회의장까지 8일부터 18일까지 튀르키예와 이스라엘 방문에 나선다.
이게 민주당 의원들의 직업윤리 수준이다. ‘방탄 국회’가 아니라고 우겼을 양이면 외유를 포기하고 자리를 지켰어야 했다. 당 대표를 위해 할 일 다 했으니 ‘포상휴가’ 삼아 다녀온다고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는 심산이었을 법하다. 그러니까 더더욱 이들의 세비는 이 대표가 책임져야 옳다. 이 대표 방호원들 보수를 왜 국민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인가.
김 국회의장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개헌론’을 제기하면서 국회의원 정수 50명 증원 구상을 밝혔다. 당 대표를 위한 방호원 역할 외엔 하는 일이 없는 국회의원들이라면 50명이 아니라 500명을 증원해도 아무 이익이 없다. 오히려 국가적 손실과 국민적 번뇌만 키울 뿐이다. 보스정당의 의원 수 증원은 우두머리 수호대 강화에 불과하다. 김 의장이 ‘임기 중 개헌’이라는 업적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으나 가당찮은 꼼수는 포기할 일이다. 한국 국회와 정당, 그리고 국회의원들의 민낯을 누구보다 똑똑히 보고 있지 않은가.
글/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