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 불법행위‧비리 덮으려 '투쟁', '단일대오' 외치는 노동계
기아 노조 티셔츠 비리 사태도 대정부 투쟁 운운하며 논란 덮기 시도
노조 회계투명성 확보 이제 첫 걸음…노동개혁 다음 스탭 밟아야
"투쟁의 동력을 상실해선 안 된다."
"단일대오로 연대하자."
운동권과 노동계 내부에서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했을 때 흔히 나오는 표현들이다. 구성원 중 누군가(특히 지도부)가 불법 행위나 비리를 저질렀을 때, 사건의 본질을 파고들어 논란이 확산되면 ‘투쟁의 동력’이 상실될 우려가 있으니 ‘동지’의 허물을 덮어 두고 ‘단일대오’로 ‘연대’해 나가자는 논리가 종종 등장한다.
자신들은 ‘정의’로운 일을 수행하고 있고 ‘불의’한 자들과 맞서고 있으니 자신들 중 누군가가 잘못을 저질러도 덮어주는 게 정의라는 논리다.
이런 논리는 과거 민주 투사들의 뒤를 털어 민주화 투쟁을 약화시키려는 독재정권에 맞서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을 법 하지만, 운동권 인사들이 상당수 정치권에 포진해 있고, 거대 노조가 권력집단화된 지금은 그들만의 ‘특권의식’으로 변질됐다.
최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 산하 기아자동차지부(기아 노조)에서 발생한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조합원들이 낸 조합비로 조성된 쟁의기금으로 지난해 구입한 단체 티셔츠의 품질이 가격 대비 형편없다는 지적에 노조 집행부는 대정부 투쟁을 이유로 조합원들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다.
집행부는 쟁의기금에서 4억6000만원을 꺼내 장당 1만5400원짜리 티셔츠 2만8200벌을 구매했다고 했으나, 티셔츠는 상대적으로 값싼 나일론 86%, 폴리우레탄 14%의 합성섬유로 만들어진 저급품이었고, 심지어 라벨조차 의류 업체가 아닌 가구업체 L사의 것이 붙어 있었다며 조합원들이 반발했다.
일부 조합원들은 올해 1월 이 사안을 놓고 국민신문고에 진정을 냈고, 티셔츠를 찢거나 티셔츠에 ‘이게 1만6000원이냐 X나 줘라’, ‘27대 집행부 정신차렷! 이게 만육천원이냐’ 등의 항의 문구를 써서 사진으로 공유하는 조합원도 있었다.
노조 집행부의 대응은 그야말로 ‘적반하장’이었다. 티셔츠 구매 과정이 규정과 절차상 문제가 없었다는 해명과 함께, 오히려 ‘윤석열 정권이 노동개악으로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시기에 노동자들을 위협하는 행위’, ‘노동조합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행위이자 반 노동자적 행위’라며 문제를 제기한 조합원들을 비난했다.
이른바 ‘정부의 노조 탄압’에 맞서는 상황에서 투쟁의 동력이 상실될 수 있으니 사태를 덮어 두자는 전형적인 방어 논리였다.
하지만 결국 경찰 수사를 통해 내막이 밝혀졌다. 노조 집행부의 일원인 간부 A씨가 입찰 업체들과 짜고 티셔츠 값을 부풀린 뒤 1억4300여만원의 뒷돈을 챙겼다는 것이다. A씨는 지난 1일 배임수재, 업무상 배임, 입찰방해 등 혐의로 구속됐다.
노조 집행부 입장에서는 조직적 비리가 아닌 ‘개인적 일탈’인데 싸잡아 매도당하는 게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내부 확인 절차도 제대로 거치지 않고 무조건 사건을 덮어두려 했다는 점은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노조 자체적으로 비리를 사전 차단하거나 적발해 낼 자정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증명한 사례이기도 하다.
큰 돈을 밀실에서 주무르다 보면 비리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노동계 내에서도 ‘조합비는 간부들의 쌈짓돈’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돌았다.
이 때문에 윤석열 정부는 노조 회계의 투명성 확보를 강조해 왔다. 그 일환으로 고용노동부는 각 노조에 회계 공시를 요구했으나,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노조 탄압’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조합원들이 낸 조합비를 투명하게 운용하라는 정당한 요구조차 탄압이라고 규정할 정도로 그들의 특권의식은 강했다.
하지만 결국 세액공제 혜택 제외 등 정책적 규제와 국민 여론, 그리고 노조 내부 조합원들의 반발에 밀려 양대 노총 모두 회계 공시를 수용했다. 기아 노조에서 있었던 노조 간부의 ‘뒷돈 챙기기’가 앞으로는 어렵게 됐다.
윤 정부의 노동개혁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노조 회계 투명성 확보로 이제 한 발을 내딛었을 뿐이다. 노조는 여전히 ‘조합원 권익 보호’라는 본래의 취지에 벗어난 행위를 벌일 만한 과도한 권한을 여럿 가지고 있다. 기업들은 쟁의 과정에서 노조에 주어진 각종 면책권으로 인해 힘의 균형이 노조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하소연한다.
회계 공시 요구 때처럼 개혁의 과정 때마다 노조와 야당의 반발은 심하겠지만,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라는 점은 그동안의 사례가 증명해 줬다. ‘투쟁’과 ‘단일대오’의 벽에 부딪쳐도 할 일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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