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용 발차기’ 어설픈 면죄부…평생 주홍글씨

이준목 객원기자

입력 2008.11.22 11:21  수정

지난 한 주간 축구계는 참으로 분주했다.

축구 국가대표팀이 최근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예선 사우디전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며 모처럼 국민들을 기쁘게 한 가운데, 프로축구는 신생구단 강원 FC의 출범과 신인드래프트를 거쳐, 어느덧 한해를 결산하는 6강 플레이오프 돌입을 앞두고 있다.

여론의 시선이 사실상 A매치에 모두 쏠리며 숨 가쁘게 지나갔던 지난 일주일 사이. 축구계에서는 중요한 이슈 하나가 석연치 않게 처리되며 은근슬쩍 묻혀 버렸다. 바로 지난 2일 K리그 경기도중 ‘발차기 파문’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이청용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청용은 약 3주전 벌어진 ‘삼성하우젠 K리그’ 25라운드 서울과 부산의 경기에서 부산 김태영을 상대로 K-1을 연상시키는 무시무시한 ‘하이킥’을 작렬시켜 레드카드와 함께 많은 축구팬들을 경악 속에 빠뜨린바 있다.

한국축구에서 촉망받던 어린 선수가 선배 선수를 상대로 고의성이 명백한 위험천만한 행위를 저지르는 모습이 TV 중계카메라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자 축구팬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분노한 팬들은 이청용의 선수로서의 기본적인 인격적 결함을 강하게 질타했으며 그에 걸맞은 추가징계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확대됐다.

지난 2일 서울-부산 경기에서 이청용의 거친 반칙이 나오자 양 팀선수들이 몸싸움을 하는 등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연맹의 해괴한 논리…부작용만 남아

그러나 정작 연맹은 ‘발차기 파문’이 벌어진 이후에도 이렇다 할 공식적인 반응을 나타내지 않다가 최근 A매치를 앞두고 은근슬쩍 추가징계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프로축구연맹 측은 규정에 따라 사건 발생 5일 뒤인 지난 7일까지 상벌위원회가 소집되지 않았으므로 이번 사안은 추가징계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한마디로 사건이 터졌을 때는 침묵하며 시간을 끌다가 이제 공소시효가 만료됐으니 명백한 죄인을 눈앞에 두고도 처벌하지 않겠다는 해괴한 논리였다.

이로서 이미 리그 최종전에 결장한 이청용은 서울이 정규리그 2위로 직행한 플레이오프 경기에 뛸 수 없지만. 팀이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하면 출전할 수 있다. 연맹이 이청용에게 합법적인 면죄부를 준 셈이다.

기왕 연맹의 결정이 내려진 상황에서 새삼 이청용에 대한 논란을 다시 꺼내드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서는 곤란하다. 축구에서 승부보다 더 귀하게 여겨야할 페어플레이 정신과, 리그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할 ‘원칙’을 그 뿌리부터 부정하는 사례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K리그에서 일상화된 거친 플레이가 이청용만의 문제는 아니다. 감정적인 여론에 치우쳐 마녀사냥식의 ‘이청용 죽이기’가 되어서도 곤란하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프로축구 경기도중 ‘상대를 향해 고의적이고 위험한 상해를 가한 선수가 명백히 비신사적인 행위를 저지르고도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례를 돌이켜보자. 지난해 FA컵 당시 심판에게 웃통을 벗고 항의하다 퇴장당해 1년 출전정지 징계를 받았던 방승환(인천), 2군경기 도중 관중들의 인신공격성 야유에 격분하여 관중석에 난입한 안정환(당시 수원), 플레이오프 경기도중 관중석으로 물병을 투척한 김영광(울산), 2군 경기 도중 상대 선수를 폭행하여 물의를 일으켰던 제칼로(당시 전북)까지, 모두 크건 작건 연맹의 추가 징계를 받았다.

바다 건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첼시의 스트라이커 디디에 드록바는 최근 리그컵 번리 전에서 동전을 관중석으로 되던졌다는 행위만으로 3경기 출전정지 징계와 벌금, 그리고 여론의 혹독한 비판까지 보너스로 받았다. 이처럼 관중이나 상대 선수에 대한 직접적 상해가 아닌 간접적 위협만 해도 엄격하게 금지하는 것이 상식인데, 과연 이청용의 사례가 이들보다 죄질이 가볍다고 할 수 있을까?


어설픈 면죄부…‘주홍글씨’로 낙인 찍혀

이청용이 K리그와 국가대표팀에서 좋은 활약을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곧 ‘속죄’가 된다는 식의 논지는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바꿔 생각하면, 만일 이번 사태가 무명선수나 외국인 선수의 경우였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결론이 났을까? 속죄란 먼저 자신이 잘못한 일에 걸 맞는 책임을 지고난 뒤에,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속죄라고 인정받을 수 있다. 음주운전을 한 사람이 사고를 낸 뒤에도 여전히 면허를 유지하며 ‘앞으로 조심할게요’하고 계속 자동차를 몰고 다니게 한다면, 그게 속죄가 성립되는 것인가?

엄밀히 말해 이청용은 ‘발차기 파문’ 이후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것부터가 잘못됐다. K리그에서도 최소한 올 시즌 플레이오프 잔여경기에서는 모두 출전을 정지시키고, 그라운드에서 직접 축구팬들에 대한 공식사과나 일정시간 사회봉사활동 명령이라도 내려서 어린 선수가 스스로의 잘못을 돌아보게 만드는 시간을 가지게 했어야했다.

만일 지난 사우디전 결승골의 주인공이 이근호가 아닌 이청용이었다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사생활의 문제였다면 몰라도, 그라운드 내에서 결코 해서는 안 될 행위를 했던 선수가 나라를 대표하는 태극마크를 달고 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청용은 아직 미래가 더 촉망되는 어린 선수다. 그럴수록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어떤 책임을 불러오는지 이번 기회에 확실히 깨닫게 했어야했다. 운동을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기본적인 인성이 부족한 선수는 나중에 베테랑이 되어서도 인격적 결함을 드러낼 위험이 높다.

연맹의 결정은 이청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청용을 죽이는 행위다. 만일 그가 합당한 징계와 책임을 기꺼이 감수한 뒤, 그라운드로 당당히 돌아와 팬들 앞에서 진심으로 뉘우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팬들 역시 시간이 흘러 어린 선수의 잘못을 젊은 날의 치기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맹의 어설픈 면죄부로 인하여, 이청용은 속죄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팬들 사이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부정적인 ‘주홍글씨’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이청용은 잠깐의 면죄부 대신 축구선수로의 더 큰 ‘이미지’를 잃어버린 것이다.

물론 이것은 분명 이청용이 자초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반성해야할 것은 이청용만이 아니라, 어린 선수를 그렇게 가르친 지도자와 소속팀의 선배·동료선수들, K리그의 문화, 그리고 면죄부를 안겨준 프로연맹이 공통으로 자성해야할 부분이다.

연맹은 이청용에게 면죄부를 쥐어줬을지 몰라도, 팬들에게 이청용의 잘못은 면죄된 것이 아니라 단지 ‘집행유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 사태는 상당히 오랫동안 팬들의 기억 속에 각인될 것이며 이청용은 그라운드에 나설 때마다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어떤 짓인지 두고두고 되새겨야 할 것이다.

팬들은 아직 이청용이 지난 2일 K리그에서 보여준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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