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왕위를 계승 중입니다. - 신검의 난 [정명섭의 실패한 쿠데타⑱]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5.08.26 14:17  수정 2025.08.26 14:17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 얘기에 가장 잘 들어맞는 사례가 바로 견훤과 그의 아들 신검과의 갈등이 아닐까 싶다. 후삼국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국가는 바로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주장한 고려와 백제의 뒤를 잇는다는 명분으로 등장한 후백제였다. 고려의 경우 궁예를 몰아낸 왕건이 고구려의 영토였던 패서의 호족 출신이라 그럭저럭 인연이 있다.


하지만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출신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백제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까? 견훤은 신라의 도성인 금성으로 가서 군인이 된다. 유력한 호족으로 성장한 아버지 아자개 때문에 인질로 끌려간 것인지 새어머니와의 갈등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혹은, 두 가지 모두일 수 있다. 금성으로 간 견훤은 서남해안 지역으로 배치된다.


오늘날의 전라도 지역인데 이때 창궐한 해적들을 막기 위해서였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창을 베개 삼아 자면서 침입에 대비했다고 나온다. 뛰어난 능력에 야심까지 있던 견훤은 낯선 땅인 그곳에서 공을 세워서 승진을 거듭했다. 아마, 신라의 통제력이 강력했다면 장군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견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견훤의 탄생 설화와 연관이 있는 금하굴ⓒ 직접 촬영

서기 892년, 그는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한 달 동안 5,000명의 부하들이 모였다는 기록을 보면 출신 지역에 상관없이 폭넓은 지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몇 년 후 지금의 익산지역인 완산주로 거점을 옮기면서 후백제를 건국했다. 그리고 북쪽의 궁예, 그리고 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왕건과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인다. 한때는 신라의 도성인 금성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 왕건을 공산 전투에서 크게 패배시키면서 주도권을 잡는다. 하지만 서기 930년 초, 오늘날의 경상북도 안동에서 벌어진 고창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기세가 꺾이고 만다. 이후에도 쭉 밀리고 마는데 이 시기, 견훤은 한 가지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바로 후계자로 삼았던 큰아들 신검 대신 막내아들 금강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한 것이다.


신검이 운주성 전투 등에서 패배하면서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여준 것 때문으로 추측되는데 신검과 양검, 용검 형제와는 달리 막내아들의 이름이 금강인 것으로 봐서는 어머니가 다른 것이 확실했다. 아버지가 같지만 어머니가 다른 형제라면 권력을 다투지 않는 상황이라고 해도 사이가 좋을 리가 없다. 거기다 견훤이 기존의 후계자인 신검을 교체하려고 하자 후백제의 조정은 큰 혼란에 빠진다.


금강이 아버지에게 왕위를 물려받는다면 신검 형제들은 제거 1순위였다. 거기다 그들의 가족과 측근들 역시 줄줄이 처형당할 게 분명했다. 그중 한 명인 이찬 능환이 파진찬 신덕과 영순등과 공모해서 반란을 모의한다. 신검 형제 역시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된다. 서기 935년 3월의 어느 날 밤, 잠을 자고 있던 견훤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눈을 뜬다. 이 때의 기록은 고려사보다 삼국유사 제2권 견훤 편에 더 명확하게 나온다.


견훤이 일어나기 전에 대궐 뜰에서 고함과 비명 소리가 들려 웬 소란이냐고 묻자 신검이 아뢰었다. "임금님께서 늙으시어 군국의 정사에 어두우시므로, 장자 신검이 부왕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해서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는 소리입니다.“


쿠데타에 성공한 신검은 이복동생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인 견훤을 금산사라는 사찰에 유폐시켰다. 그리고 파달과 30명의 장사를 시켜서 감시하도록 했다. 진행 과정은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성공적으로 이뤄진 것이 분명했다. 만약, 후삼국 시대가 조금만 더 이어졌거나 백제가 통일하는데 성공했다면 신검의 반란이 아니라 935년의 간지가 을미년이기 때문에 아마도 을미정사나 을미정난쯤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역사가 신검의 쿠데타를 반란으로 만들었다. 금산사에 유폐되었던 견훤이 기회를 틈타 탈출해서 하필이면 왕건에게 망명한 것이 문제였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신검은 사면령을 내리면서 민심을 다독거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견훤을 미워하는 세력도 많았지만 반대로 그를 지지하는 세력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고려로 망명했던 견훤이 왕건과 함께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후백제를 공격하러 온 것이다. 신검 역시 대군을 이끌고 출정해서 일리천에서 마주친다. 양군은 오늘날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에 있는 일리천을 두고 대치했다. 시작부터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후백제군은 자신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고려군에 압도당했고, 무엇보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고려에 가담했다는 것에 심하게 동요한 상태였다. 서기 936년 9월에 벌어진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했고, 퇴각하던 신검은 백제의 계백장군이 결사대를 이끌고 싸우다가 전멸한 황산벌에서 결국 항복하고 만다. 자신은 물론 후백제까지 멸망으로 이끈 반란을 일으킨 신검은 다른 가담자들과는 달리 용서 받지만 제 명대로 살았을 것 같지는 않다는 게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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