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흐르는 선율”… 역사가 된 공간들의 부활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5.09.19 14:00  수정 2025.09.19 14:00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화예술 공간들이 잇따라 다시 문을 열고 있다. 이들의 귀환은 낡은 공간의 물리적 복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 공간이 축적해 온 역사와 정신을 현재의 대중과 나누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깊은 의미를 지닌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기록원


그 신호탄 중 하나는 38년 만에 돌아온 클래식 음악의 전당 ‘르네쌍스 음악감상실’이다. 1951년 대구 피난지에서 시작해 1986년 서울 종로에서 막을 내렸으나, 지난 9월 16일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집 라운지룸에 ‘르네쌍스, 르:네쌍스’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아르코예술기록원에 따르면, 이 공간은 설립자 고(故) 박용찬(1916~1994) 선생이 남긴 “음악이 주는 해방감과 평안을 대중과 나누고 싶다”는 뜻을 이어받아 조성됐다.


이 공간에는 박용찬 선생이 기증한 LP 컬렉션을 중심으로 운영되며, 당시 사용됐던 JBL 하츠필드 D30085 스피커와 축음기를 비롯해 신문 기사, 티켓 등이 전시돼 있다. 사전 예약제를 통해 소수의 인원이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과거 LP 음악 감상이라는 행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깊이 있는 음악적 경험을 제공하려는 시도다.


클래식 선율이 LP판 위에서 되살아나는 한편, 라이브 재즈의 즉흥적인 선율 또한 새로운 터전에서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1978년 개관 이래 47년간 한국 재즈의 산실이었던 ‘재즈클럽 야누스’ 역시 지난 9월 15일 서울 광화문에 새 둥지를 틀고 부활을 알렸다. 재즈 보컬리스트 박성연이 설립한 한국 최초의 재즈클럽으로 수많은 뮤지션이 거쳐 간 상징적인 공간이었으나, 임대 문제 등으로 압구정 시대를 마감해야 했다. 새로운 ‘야누스’는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와 JNH 뮤직 이주엽 대표가 공동 운영을 맡아 안정성을 꾀하고, 광화문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내외국인 관객층을 넓혀 ‘한국의 블루노트’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야누스

음악이 흐르던 공간뿐 아니라, 시대의 목소리를 담아내던 연극 무대 역시 새로운 방식으로 생명을 연장했다. 소극장 운동의 심장이었던 ‘학전소극장’이 그 사례다. 1991년 가수 김민기가 설립해 뮤지컬 ‘지하철 1호선’ 등 수많은 창작극을 선보였던 학전은 경영난으로 지난해 3월 폐관했으나, 같은 해 7월 ‘아르코꿈밭극장’으로 다시 태어나 운영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나서서 공간의 명맥을 잇기로 결정한 것이다. 새로운 극장은 학전이 마지막까지 힘썼던 어린이·청소년 연극의 정신을 계승, 공공극장으로 전환하여 미래 세대를 위한 문화 공간이라는 새로운 공공적 가치를 부여받았다.


이처럼 각기 다른 역사를 지닌 공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부활하는 현상은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시대의 피로감 속에서 아날로그적 경험에 대한 대중의 갈증이 커진 현상을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스마트폰과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가 문화생활의 중심이 되었지만, 한편에서는 LP 사운드의 질감, 소극장 연극의 현장감처럼 직접 몸으로 겪는 ‘공간의 경험’을 찾는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는 ‘뉴트로(New-tro)’ 트렌드와도 맞물린다. 기성세대에게는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고, 젊은 세대에게는 겪어보지 못한 과거의 문화가 새롭고 독특한 경험으로 다가오며 세대 간 문화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의 요구와 시대적 흐름에 부응한 부활이 지속적인 성공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 또한 명확하다. 과거의 명성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현재의 관객과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콘텐츠 기획이 필수적이다. 또한 대부분의 문화 공간이 겪는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안정적인 운영 모델 구축도 시급하다.


학전의 사례처럼 공공이 개입하여 역사적 공간을 보존하는 방식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결국, 부활한 공간들이 다시 한번 시대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문화적 구심점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유산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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