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고향 [조남대의 은퇴일기(82)]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5.09.23 14:16  수정 2025.09.23 14:16

삶은 멈춤을 모른 채 흘러간다. 물도 산을 타고 들을 거치며 우리의 삶과 같이 쉼 없이 나아간다. 한 방울의 물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모이고 흘러 거대한 강이 되어 마침내 바다에 닿는다. 시작이 어디인지 돌아보는 일은 곧 나의 근원을 찾아가는 일이 아닐까.


태백 바람의 언덕 정상 고랭지 배추밭에서 바라본 일출 ⓒ

여행 작가들과 함께 강의 발원지를 찾아 태백을 찾았다. 특히 삼수령은 남한강, 낙동강, 오십천이 갈라져 흘러가는 장엄한 분수령이다. 이곳에 떨어진 한 방울의 빗물은 남쪽으로 스며들면 낙동강이 되어 영남 내륙을 휘돌며 남해로 가고, 동쪽으로 굴러가면 오십천을 따라 곧장 동해로 달린다. 서쪽으로 방향을 잡은 물방울은 한강이 되어 수도 서울을 거쳐 서해에 몸을 풀어낸다. 똑같은 빗방울이지만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바다에 닿는다.


삼대강의 꼭짓점인 삼수봉 가는 길 안내문 ⓒ

삼수령 앞에 서자 인생의 갈림길이 떠올랐다. 순간의 작은 선택이 삶의 방향을 바꾸고, 마침내 전혀 다른 종착지에 다다른 것처럼, 젊은 날의 결단이 삼십여 년을 공직의 길로 이끌었다. 지금의 나는 한때의 머뭇거림, 헤매고 후회하던 길조차 달래고 치대며 살아온 결과가 아니겠는가. 물이 바위에 부딪히며 길을 낸다. 나 역시 그런 상처를 달래며 굽이쳐 온 것이다. 이제는 그 수고를 내려놓고, 잔잔하고 넓은 바다로 들어설 때가 되었음을 느낀다.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연못 ⓒ

황지연못은 낙동강의 발원지다. 시내 한복판 건물에 둘러싸인 세 개의 작은 연못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보잘것없어 보인다. 이곳이 천리길을 이루는 낙동강의 발원지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물줄기는 안동과 상주, 대구와 밀양을 거치며 점점 넓어지고 깊어져, 밭을 적시고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는 젖줄이 된다. 영남의 넓은 농토를 푸르게 만들어온 역사가 이 작은 연못에서 비롯된 것이다.


황진연못 바로 옆 광장에서 축하공연 장면 ⓒ

연못 앞에 서자 ‘작은 것의 위대함’이 선명해진다. 눈에 띄지 않는 시작이 결국 큰 흐름을 만든다. 초라한 출발일지라도 부끄럽지 않은 까닭은 그 안에 꾸준함이 있기 때문이다. 멈추지 않고 흐른다면 마침내 넓은 강으로 자라나 목마름을 축일 수 있다. 인생 또한 그러하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에서 생명이 자라나듯 사소한 마음 하나, 작은 선행 한 번이 먼 훗날 세상을 따뜻하게 물들이지 않는가. 황지연못은 속삭인다. 시작이 크지 않아도 괜찮다고, 흐르며 스스로 넓어진다고.


남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에서 솟아오르는 연못 ⓒ

검룡소는 남한강의 발원지다. 하루 칠천 톤의 차가운 물이 바위 틈새에서 멈추지 않고 박차고 나온다. 그 형상은 마치 검푸른 용이 몸을 틀며 하늘로 치솟으려는 듯하다. 푸른 이끼 낀 계곡은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더한다. 지하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는 물은 연중 9도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 겨울에도 얼지 않고, 여름에는 시원해 많은 이들이 더위를 피해 찾아든다. 이 물은 충주와 원주, 여주를 지나 양평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만나 한강을 이루고, 서울을 관통하는 도시의 젖줄이 된다.


검룡소 앞에 서면 인생의 다른 얼굴이 겹쳐진다. 삶은 늘 제자리에 머무는 듯하지만, 깊은 내면에서 끊이지 않는 힘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뜻하지 않은 시련이 찾아와도 수천 년 동안 솟는 샘처럼 격랑을 헤쳐나간다. 검룡소는 말한다. 삶의 가치는 출발의 크기보다 끝까지 용기를 잃지 않는 힘에 있다고. 잠시 주저앉아도 언젠가는 다시 흘러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검룡소에서 아래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물 ⓒ

오늘의 젊은 세대도 이 교훈을 새겼으면 한다. 편안함에 길들여 작은 좌절에도 쉽게 주저앉는 모습이 안타깝다. 인생은 고요한 연못이 아니라 쉼 없이 솟구치는 샘물이다. 검룡소처럼 젊은이들도 내면의 힘을 믿고 도전해야 하지 않을까. 힘들고 버겁더라도 다시 일어서라. 노력하는 삶에는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태백 바람의 언덕 고랭지 배추밭에서 바라본 일출 ⓒ

태백에서 만난 강의 고향은 인생을 비춰주는 거울이었다. 물은 흔들리고 부딪히며 깨지기도 하지만 끝내 바다라는 품을 향해 쉼 없이 나아간다. 우리 또한 그러하다. 누구는 큰 강처럼 세상의 중심을 적시고, 어떤 이는 작은 시내처럼 이웃의 목마름을 달래며 살아간다. 크고 작음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삼수령은 선택의 무게를, 황지연못은 작은 시작의 가치를, 검룡소는 끊임없는 도약의 힘을 일깨워주었다. 이제 흐름의 끝자락에서 잔잔히 바다를 바라본다. 인생은 한 방울의 물처럼 겸허히 꿋꿋하게 흘러, 더 큰 품으로 나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조남대 작가 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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