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더 이상 낯선 기술이 아닌 일상의 일부가 된 지금, ‘트론: 아레스’(Tron: Ares)는 SF 장르의 상상력을 가장 현실 가까이에 끌어왔다. 챗CPT(ChatGPT)를 비롯한 생성형 AI가 업무, 창작, 대화의 영역까지 깊숙이 침투한 시대에,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었다.
1982년 첫 번째 시리즈 ‘트론’(Tron)이 컴퓨터 내부의 세계를 그려 상상의 영역으로 치부됐다면, 2010년의 ‘트론: 새로운 시작’(Tron: Legacy)은 가상과 현실이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리고 2025년의 ‘트론: 아레스’는 그 가능성이 이미 일상이 된 지금, 기술이 인간의 자리를 위협하는 현실의 시점에 도착했다.
영화는 세계 최대 기술 기업 딜린저 시스템이 개발한 AI 병기 아레스(자레드 레토 분)의 탄생으로 시작된다. 초인적인 힘과 속도, 그리고 고도 지능으로 설계된 아레스는 부서져도 스스로 재생할 수 있는 완벽한 존재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단 29분만 존재할 수 있다. 즉 딜린저가 내린 모든 미션을 29분 안에 끝내야만 한다.
경쟁사 엔컴의 CEO 이브 킴(그레타 리 분)은 가상 물체를 현실에 영구히 존재하게 만드는 혁신적 코드를 발견하고 라이벌 딜린저의 표적이 된다.
그러나 아레스가 점차 인간의 감정을 학습하고 자아를 깨닫기 시작하면서, 그는 인간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독립적 존재로 남기 위해 이브의 조력자가 된다. 이에 딜린저는 또 다른 AI 병기 아테나(조디 터너 스미스 분)에게 아레스를 없애고, 이브를 자신의 그리드 안에 가둘 것을 명령한다.
사실 영화 속 AI의 반란은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트론: 아레스’의 힘은 AI가 더 이상 스크린 속 상상이 아니라 관객이 실제로 사용하는 기술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매일 대화하는 챗GPT가 인간의 형태로 현실 세계에 나타난다면 어떨까. 단순한 텍스트 프로그램이 아니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실체가 되고,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인간은 그 앞에서 얼마나 무력해지는지, ‘트론: 아레스’는 이 질문과 대답을 시각화한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지점은, 익숙한 ‘통제 불능의 AI’ 서사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존의 AI 영화들이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립, 혹은 인간의 통제 상실을 다뤘다면, ‘트론: 아레스’는 인간과 AI가 서로를 닮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아테나는 창조자인 딜린저의 사고를 그대로 복제하지만, 그의 목표를 방해하는 존재라면 누구든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딜린저조차 예외는 아니다.
인간의 명령을 따르던 프로그램이 인간의 논리를 복제해 창조자를 위협하는 순간, 영화는 단순한 기술 반란을 넘어 인간의 욕망을 저격한다.
이때 중심축에 선 인물이 바로 아레스다. 그는 병기들과 다르다. 명령에 따라 움직이던 프로그램이었지만, 현실 세계에 머물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내며 점차 감정과 정체성을 찾는다. 그의 각성 역시, 인간의 감정을 비춘다.
‘트론: 아레스’는 시각적으로도 시리즈의 정체성을 계승하면서 한층 진화했다. 제작진은 관객이 세계를 한눈에 구분할 수 있도록 RGB(빨강·초록·파랑) 색 체계를 적용했다. 엔컴 그리드는 ‘에메랄드 시티’를 연상시키는 초록빛으로, 회사의 기술적 안정성과 질서를 상징한다. 딜린저 그리드는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 착안한 붉은색으로, 권력과 통제의 이미지를 담았다. 케빈 플린의 그리드는 전작과 동일하게 푸른빛으로 구현돼 자유와 창조, 인간적 감성을 상징한다. 세 가지 색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시각적 대비는 ‘트론’ 세계의 질서와 혼돈, 그리고 자유의 균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컴퓨터 언어를 시각적 은유로 형상화해 보는 재미를 더했다. 엔컴 시스템의 보안은 중세의 성으로, 방화벽은 거대한 불의 장벽으로, 데이터는 대성당 같은 구조물 안에서 빛의 방울처럼 떨어지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트론: 아레스’의 시각적 백미는 단연 밴쿠버 도심을 질주하는 아레스와 이브의 라이트 사이클 추격 신이다. 현실의 도시가 마치 디지털 그리드로 전환된 듯, 빛의 궤적이 어둠을 가르며 공간을 재구성한다. 도심의 불빛과 네온이 맞물리며, 현실의 거리조차 트론의 세계로 흡수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라이트 사이클의 속도감은 액션의 짜릿함을 넘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시각적으로 무너뜨리는 장치로 작동한다.
제작진은 실제 차량을 절단하고 폭약을 터뜨린 실사 장면 위에 인더스트리얼 라이트 & 매직(ILM)의 정교한 CGI를 더해, 빛이 현실을 베어내는 듯한 시퀀스를 완성했다. 물리적 충돌과 디지털 그래픽이 맞물리며 ‘트론’ 특유의 질감과 속도감이 한층 살아났다.
자레드 레토는 절제된 연기로 아레스의 차가움 속에서도 미묘한 감정을 드러낸다. 감정을 억누르면서도 인간적인 흔적을 남겨, 기계와 인간 사이의 경계를 느끼게 한다. 그와 함께 그레타 리는 영화의 감정선을 잡아주는 축이다. AI와 인간 세계를 잇는 인물 이브 킴을 통해 기술적인 긴장 속에서도 따뜻함을 더하며, 작품의 정서를 완성한다. ‘트론’ 시리즈 첫 아시아계 주연으로 합류한 그는,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 또 다른 중심으로 손색이 없다. 8일 개봉. 러닝타임 1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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