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0월 9일 동독 숨통 조인 라이프치히 영웅들, 2025년 10월 10일 평양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5.10.10 08:30  수정 2025.10.10 08:30

“어떤 삶인가요? 여러분의 의견을 말하세요”, 귄터 자틀러가 시(詩)로 보여주었다면(9월 19일 칼럼) 이번에는 영상이다. 지이크베르트 쉐프케(Siegbert Schefke)가 동독의 숨통을 끊는데 결정타를 날렸다.


1989년 10월 9일 월요일, 동독 제2의 도시이자 도서박람회로 유명한 라이프치히, 운명의 날이 밝았다. 중심은 성 니콜라이교회였다.


9월 4일 월요일부터 매주 정례화된 ‘월요시위(Montagsdemonstrationen)’ 규모가 갈수록 커졌지만, 당국은 통제할 수 있었다. 두들겨 패고 수갑 채웠다. 참가자는 수천에서 2만 명 정도였다.


변화를 거부하는 공산당과 서기장 호네커, 10월 7일 동베를린에서 밤낮으로 거행된 가증스러운 건국 40주년 행사가 라이프치히 시민의 가슴에 불을 놓았다. 자유를 향한 의지를 갑옷으로 두른 시민들은 더 이상 겁내지 않았다.


라이프치히 공산당은 이날 성 니콜라이교회를 위시해 시 곳곳의 교회에서 동시에 열리는 ‘평화기도회’가 끝난 후 시위가 계획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3000명의 무장 진압경찰, 5000명의 인민경찰을 동원했다. 도시 외곽에는 1500명 인민군도 대기시켰다. 700명 관변 인력을 교회 내에도 심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자 교회가 바삐 움직였다. 이른 아침 비폭력 촉구 성명서를 발표했다.


쉐프케가 촬영한 영상을 방송하는 1989년 10월 10일 서독TV ARD의 ‘Tagesschau’ ⓒTagesschau캡쳐

라이프치히의 유명한 교향악단 게반트하우스(Gewandhaus)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도 나섰다. 지구공산당 서기 3명을 만나 비폭력을 호소하고 설득했다. 카바레 예술가 베른트-루츠 랑에, 신학자 페터 찜머만도 동참했다.


‘라이프치히 6인(Leipziger Sechs)’으로 명명된 이들의 호소문, “우리 모두는 자유로운 의견교환이 필요하다, 우리는 대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길 원하고, 이를 위해 모두가 신중하기를 시급히 요청한다”를 마주어가 라디오방송을 통해 직접 읽어 전 시(市)에 알렸다.


예배를 마친 시민들이 칼-마르크스 광장(현 아우구스투스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인파는 갈수록 급증했다.


7만 명이나 집결했다. “우리가 바로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와 “폭력 반대”를 외치는 시민들에 경찰과 비밀경찰 슈타지(Stasi)가 막아서야 했다.


시가지 행진이 시작되었다. 수(數)와 전의에 압도당한 공산당 지구책임자와 진압대장은 넋을 잃었다. 진압부대가 오히려 시위대에 의해 포위되었다.


인민군도 내려진 명령에 따라 진압에 나서야 했으나 움직일 수 없었다. 동베를린의 중앙당 지도부와는 연락조차 잘되지 않았다. 그들도 어떻게 수습해야 할 것인지 우왕좌왕했다.


마침내 내무장관으로부터 명령이 떨어졌다. 시위대를 공격하지 말고, 진압대 활동을 ‘자기 보호’에 제한하라는 것이었다. 동독 역사상 처음으로 공권력이 진압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동독 공산당이 처음으로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인민민주주의’를 표방했으나 인민을 굴종시켰던 동독 국가권력이 인민에게 굴복했다.


라돔스키가 찍은 라이프치히 시위 ⓒ Robert-Havemann-Gesellschaft/Aram Radomski

1953년 6월 17일, 동독에서 일어난 최초의 인민 봉기 때와는 달리 소련군 탱크도 병영을 떠나지 않았다. 소련공산당이 더 이상 동독공산당을 돕지 않았다.


시내 중심가 전체를 일주해 행진한 시위대는 저녁 8시 반경 해산했다, 연초부터 시작된 자유를 향한 행진이 거둔 첫 승리였다.


지이크베르트 쉐프케가 없었더라면, 이 역사적 사건은 좀 큰 에피소드로만 묻힐 뻔했다. 그로 인해 라이프치히 영웅들의 극적 승리가 극적으로 TV에 방송되었다.


1959년 생 쉐프케는 동독 체제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여겼다. 당국의 개혁 운운을 믿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환경운동가로 포장해 그는 1986년 동베를린에서 반체제적인 ‘환경도서관(Umwelt-Bibliothek)’ 설립에 가담했다. 동독의 환경파괴 실상을 영상으로 담으며 시민운동가로 나섰다.


환경도서관에서 사진작가 아람 라돔스키(Aram Radomski)를 알게 되었다. 사실 라돔스키는 1987년부터 동독의 실상을 사진에 담아 서독 신문에 몰래 내보내는 위험하고 불법적인 일을 하던 터였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당국이 선전하는 동독이 아닌 실제, 동독의 이면을 영상과 사진으로 남기는 작업에 착수했다. 역사적 건축물들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환경손상의 실태가 어떤지를 촬영했다.


1989년 여름 라이프치히를 찍기 위해 방문했을 때, 온통 깨어진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한 여인이 “이런 것을 찍어 신문에 내란 말이야,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 사는지를”이란 외침을 들으면서 자신들의 사명을 다시 한번 다졌다.


녹녹한 슈타지가 아니었다. 당연히 두 사람은 감시되었다. 쉐프케가 자기 집을 감시하는 세 명의 슈타지 요원 사진을 찍기도 했다.


‘라이프치히 빛축제’ © discover Germany

쉐프케가 아침에 빵을 사는 모습, 쉐프케와 라돔스키가 함께 집을 나서는 장면 등등의 사진들이 슈타지 파일에 정리된 것을 통일 후 볼 수 있었다. 슈타지가 그의 집 바로 건너편에 세를 내 머물며 그를 감시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건국 40주년 행사를 지켜본 두 사람은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이란 소식을 접하고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먼저 그동안 비밀리에 접촉했던 서베를린의 연락책을 만나 비디오카메라를 밀반입했다.


동베를린에서 출발할 때 당연히 자신의 집을 슈타지가 감시하고 있었다. 쉐프케는 천장에 난 구멍을 통해 집을 빠져나왔다.


두 사람은 라이프치히 시위를 어둠 속에서 비밀리에 촬영했다. 영상을 확보한 후 즉시 동베를린으로 달려와 서베를린 연락책에게 비디오를 넘겼다. 즉각 서베를린으로 전달되었다.


두 사람은 숨죽이며 서독 TV방송 ARD(우리의 KBS1)의 밤 10시 뉴스 ‘오늘의 소식(Tagesthemen)’을 지켜보았다. 라이프치히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5~8만 명의 시민이 참여한 대규모 봉기가 평화롭게 진행되었다고, 영상 없는 소식만을 앵커가 전했다.


아쉽고 초조한 시간이 지나고 다음날 10일 ARD의 저녁 8시 ‘뉴스쇼(Tagesschau)’, 마침내 그들의 영상이 방영되었다. 2분30초 정도에 라이프치히에서 어떠한 투쟁이 벌어졌는가를 동독 주민 대부분이 보고 알 수 있었고, 서독 주민이 지켜보았고, 전 세계가 인식했다.


동독 주민들은 폭력적 공권력에 대한 라이프치히 시민의 승리에 고무되었다. 10월 16일 월요일, 라이프치히 시민 15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동독 전역에 자유와 개혁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날 저녁 동독 공산당 정치국회의에서 당 서기장 호네커가 쫓겨났다. 공식적으로는 17일 아침 그가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다는 소식이 공표되었다.


40번째 건국일을 맞아 개혁·개방과 변화를 거부하며 그가 부르짖었던 “전진뿐이다, 후퇴란 결단코 없다(Vorwärts immer, rückwärts nimmer!)”의 공허한 메아리 열흘째였다.


그해 초 1월 19일 호네커가 “(베를린) 장벽은 건설 당시의 조건이 변하지 않는 한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장벽을 건설한 이유가 제거되지 않는다면 50년, 심지어 100년 후에도 여전히 존재할 것입니다”라 호언장담했던 베를린 장벽도 11월 9일 무너져 내렸다. 11개월 후 동독은 사라지고, 독일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라이프치히의 10월 9일이 없었다면 역사의 물줄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자유의 행진이 벌어졌던 라이프치히 입구 ​도로표지판에는 ‘영웅들의 도시(Heldenstadt)’라는 이름이 추가되었다. 라이프치히 시민, 동독 주민이 영웅이었다.


200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에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함께한 쉐프케 © Frank Ebert

2009년부터 라이프치히는 매년 10월 9일, 동독의 몰락을 이끌고 독일 통일의 길을 닦았던 ‘월요시위’를 기념하는 ‘라이프치히 빛축제(Lichtfest Leipzig)’를 열고 있다. 저녁 7시부터 전통적인 ‘평화기도회’와 함께 시작되는 축제는 ‘라이프치히 89’를 상징하는 수천 개의 촛불과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공연으로 역사적인 그날을 기념한다.


통일부 장관 정동영은 9월 30일 외쳤다, “북한이 의심하는 독일식 흡수통일은 우리가 원하는 통일의 길이 아닙니다.”


그에게 묻는다. 독일 통일이 흡수통일인가, 아니면 동독 주민의 피와 땀과 자발성에 의한 평화적 합의통일인가?


오늘 10월 10일 당 창건 80돌을 맞아 김정은이 평양에서 성대한 경축 행사를 펼친다. 인민군과 주민의 충성 함성이 하늘을 찌를 것이다. 오열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묻는다.


북한 주민 여러분,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진정으로 열망하십니까?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또 하나 그들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정동영이 한 “현실적으로 한반도에서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를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우리에게도 “여러분의 의견을 말하세요.”

글/ 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전 통일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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