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인종은 재위 기간 중 두 번의 반란을 겪었다. 한번은 앞서 소개한 이자겸의 난이었고, 두 번째는 묘청의 난이었다. 이자겸의 난은 그나마 반란의 정석적인 루트를 걸었다면 묘청의 난은 여러모로 이상하게 시작해서, 이상하게 끝났다. 반란을 일으키면 보통 자신이 왕이 되거나 혹은 현재의 왕을 쫓아내고 누군가를 그 자리에 앉히는 쪽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묘청의 난은 인종을 쫓아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종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추대했고, 심지어 옥좌까지 만들어놨다. 그렇게 된 이유는 바로 서경 천도 운동 때문이었다.
고려는 왕건의 고향인 개경을 도읍으로 삼았다. 지금의 개성 지역인 개경은 송악이라고도 불렸다.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은 당시에는 서경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당시 중국의 정세가 크게 요동쳤다. 고려와 여러 번 치고받았던 거란족의 요나라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강화전쟁기념관의 뇌등석포 그림 ⓒ 직접 촬영
금나라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서기 1126년, 금나라의 군대가 송나라의 도읍인 카이펑을 점령하고, 송나라의 황제와 황족들을 사로잡았다. 큰 타격을 입은 송나라는 강남으로 물러나서 겨우 세력을 유지했다. 역사에서는 이 시점부터 송나라의 역사를 북송과 남송으로 구분 짓는다. 중국이 이렇게 대격변을 겪으면서 고려에게 여파가 미친다. 고려는 여진족의 기세가 높아지자 윤관 장군이 별무반을 동원해서 선제공격에 나섰다가 예상 밖으로 강력한 여진족의 저항이 고전한 적이 있었다. 그런 여진족이 나라를 세우고 송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다는 사실은 고려를 위기감에 몰아넣었다. 이즈음에 등장한 묘청은 색다른 주장을 펼친다.
이자겸의 난 때 왕궁이 불타버린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가자는 서경 천도론을 펼친 것이다. 그리고 묘청의 이런 주장에 많은 관료들이 찬성하는데 주로 서경 출신들이었다. 인종도 한때 묘청의 주장에 혹해서 서경에 별궁을 짓고 자주 행차했다. 하지만 서경 천도론은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 출신 관료들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해서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그러자 초조함을 느낀 묘청은 서기 1135년, 서경에서 지지 세력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대위국이라는 국호와 천개라는 연호도 지어서 자신들의 스케일을 자랑한다. 묘청의 반란은 신채호가 한반도 천년의 역사 속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고 평가했으며, 당대에도 큰 파장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김부식을 지휘관으로 하는 진압군이 도달하자 불안감에 빠진 조광이 묘청과 주모자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해서 죽인다. 거창한 국호와 연호에 걸 맞지 않는 다소 생뚱맞은 죽음이었다.
조광은 베어버린 묘청의 목을 김부식에게 보내서 항복을 시도한다. 하지만 고려 조정의 관료들이 강경하게 진압을 지시하면서 서경의 반란군들은 다시 성문을 닫아걸고 저항한다. 그 이후 1년 동안의 반란은 조광이 지휘해서 일부에서는 묘청의 난이 아니라 조광의 난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묘청이 주도해서 일으킨 반란이었기 때문에 조광의 이름은 묻혀버리고 만다. 이판사판이 된 조광은 1년 넘게 저항을 이어간다. 그냥 처음에 묘청의 목을 가지고 항복했을 때 적당히 구슬려서 성문을 열었으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지 않았을 텐데 몇 명의 잘못된 판단이 일을 엄청나게 크게 만들어버린 셈이다.
진압군을 지휘한 김부식은 석포 같은 공성 무기를 만들어서 성벽을 공략하면서 장기전에 돌입한다. 고립된 서경에서는 간간이 병사들을 내보내서 반격을 시도한다. 하지만 김부식이 구축한 철통같은 방어망을 뚫지 못한다. 간혹, 반란군이 기습에 성공해서 피해를 입히기는 했지만 포위망을 뚫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다 김부식이 항복한 반란군들을 죽이거나 고문하지 않고 잘 대우해주는 심리전을 펼친다. 항복하면 다 죽는다고 떠들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알려주면서 반란군의 사기를 떨어뜨린 것이다. 해를 넘긴 포위망에 반란군의 사기는 뚝 떨어진다. 그걸 확인한 김부식은 최후의 공격을 감행한다. 5백여 년 전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양만춘이 지키는 안시성을 함락하기 위해 토산을 쌓은 것처럼 토산을 만든 것이다. 차이점이 있자면 이세민은 실패했지만 김부식은 성공했다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토산을 다 쌓기 전에 기습적으로 공격해서 큰 피해를 입혔다. 조광을 비롯한 반란군 수뇌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1년 동안 이어진 묘청 없는 묘청의 반란은 막을 내린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서경은 물적 피해 외에도 정치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한때는 개경에 버금가는 위상이었지만 반란을 일으킨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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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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